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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그 꽃이…

김영희(시인)   
입력 : 2003-03-18  | 수정 : 200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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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간에 화사한 봄꽃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서로 '나 좀 보아달라'는 듯이. 그에 뒤질세라 솜털 뽀얗게 뒤집어 쓴 잎들 또한 뾰족뾰족 새순을 밀어 올리고 있다. 추운 겨울, 그들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다가 여기 다시 어떤 인연으로 왔을까? 빼꼼이 내미는 그 많은 얼굴들을 바라보면 생명에 대한 경외감과 신비감이 솟구친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를 보듬는 손길처럼 온종일 가슴이 두근거린다. 우리 집에는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지내온 꽃들이 많다. 수십 개의 분(盆)중에서도 유난히 아릿한 추억이 서린 꽃들이 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곡'(石斛)과 '천사의 춤'이 바로 그것이다. 석곡은 난초과의 하나로 주로 바위나 고목에 붙어산다. 보통 5∼*월경에 흰 꽃을 피우는 것도 있으나, 이맘때쯤 연분홍이나 보라색 꽃을 피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천사의 춤'이라는 일종의 양란이다. 샛노란 바탕에 점점이 찍혀있는 갈색의 점들과 줄무늬들, 나는 이 꽃을 볼 때마다 슬픈 전설을 가진 삐에로를 생각하게 된다. 두 팔을 벌리고 피어있는 그 모습은 흡사 삐에로를 연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유난히 이 두 종류의 꽃에 대해서 아릿함을 가지는 것은, 몇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와 얽힌 사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았다. 황급히 집을 떠나면서, 나는 다음날로 곧 돌아오리라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나섰던 그 길은, 아버지를 영영 볼 수 없는 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일주일만에 돌아온 빈집, 문을 여는 순간 나를 맞아준 것은 두 꽃들이었다. 큰 자배기 가득 심어놓았던 석곡이 한아름의 꽃을 흐드러지게 매달고 있었다. 또 그 옆에는 줄기 가득 샛노란 얼굴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마치 환상의 군무(群舞)를 펼치고 있는 듯했다. '그간 물도 주지 못했는데, 슬픔에 젖은 내 마음을 저토록 환한 얼굴로 맞아주다니….' 주인 없는 빈집에서도 저들은 스스로 제 할 일을 다하고 있었구나 하는 죄책감과 함께 북받치는 슬픔에 나는 그 꽃들을 바라보며 한참을 엉엉 울었다.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들여다 본 그 꽃들은 분명 나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곰곰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어느 누가 나에게 이토록 절실한 말을 건넨 사람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아름답다. 비록 그것이 그 어떤 것이든…. 그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바라만 보아도 가슴을 뛰게 하는 생명의 신비, 그들로 인해 내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숙연함을 갖게 한다. 지금 우리 집 베란다에는 다시 그 꽃들로 환하다. 나를 울렸던 그 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