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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의 미학

김남환(시인)   
입력 : 2003-03-18  | 수정 : 200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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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사계절 중에서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서슴없이 겨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계절마다 변신하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살면서 우리 인간은 철들어가며 성숙하기 마련일 테지만 겨울나무만큼이나 나에게 큰 스승도 없을 것 같다. 나는 요 몇 년 동안 겨울만 되면 거리에 늘어선 가로수를 눈여겨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봄이면 싹을 틔우고 여름에는 푸른 젊음을 만끽하며 가을이면 무수한 열매들을 땅으로 되돌리는 나무들도 거룩하지만, 가진 것 죄다 버리고 허공에 내던진 정갈한 알몸뚱이의 겨울나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빈손 빈 마음의 겨울나무, 그 차디찬 고독이 일러주는 무언의 메시지가 바람을 타고 가슴을 파고든다. 무거운 영광도 화려한 젊음도 훌훌 떨어버린 겨울나무의 깨끗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옛날 눈 속에 꿇어앉아 계도(戒刀)로 왼팔을 잘라 달마대사에게 바치고 구도(求道)의 붉은 피를 뿌렸던 혜가 선사를 연상하게 된다. 워낙 게으른 탓도 있고 또 무릎 관절도 시원찮은 나에게는 산에 오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겨울이 되면 동안거(冬安居)에 든 나무들을 만나보고 싶어 혼자서 북한산을 오를 때가 더러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친구와 둘이서 북한산 도선사를 찾았었다. 모처럼 도선사에 사서 기도를 올리자는 친구의 제의에 맞장구를 쳤지만 나는 내심 기도보다는 겨울산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절 입구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에서 절까지 가는 완만한 산길은 언제 걸어도 기분 좋은 산책로의 구실을 해준다. 길 왼쪽 끝에서 내려다보니 나무들의 발목을 뒤덮고 있는 낙엽들이 깊은 겨울임을 실감케 해준다. 그렇다. 그 울창했던 숲은 흔적이 없고 체념한 듯 하늘에 곧추세운 꼿꼿한 의지의 겨울나무들. 얼어붙은 땅 속 뿌리들마다 그리고 시린 가지마다 숨쉬고 있을 생명의 불씨를 생각해 본다. 저들의 겨울나기는 힘겹겠지만 그래도 다가올 봄을 길어 올리기 위해서는 죽은 듯이 참고 견디어야 하기에 겨울나무는 저렇게 버티는가 보다. 봄이면 온 몸을 달구어 단 며칠동안의 짧은 시간을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기 위하여 초죽음의 추위를 부둥켜안고 긴 혹한 속을 살아남아야 하는 겨울 나무들. 매사에 참을성이 없는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겨울나무의 아름다운 고통을 한번쯤 깊이 새겨볼 일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