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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편지

김영희(시인)   
입력 : 2003-03-18  | 수정 : 200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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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통의 두툼한 편지를 받았다. 오랜 전 이웃에 살면서 알게 되었다. 그 후 지방으로 이사를 가고, 이래저래 소식 끊어진 지 꽤 오랜만에 받아보는 편지였다. 간혹 그림 전시전 소식을 보내오긴 했어도 정작 한번도 가 보지는 못했다. 깨알 만한 글씨로 빼곡이 쓴, 그것도 연필로 꾹꾹 눌려가며 쓴 편지였다. 그 작은 글씨로 A4지 일곱 장을 썼으니 오죽 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었겠는가. 그 전부터도 얼핏 내비치는 이야기 속에는 삶이 그리 평탄한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들긴 했었다. 요즘에야 흔한 일이지만 20여 년 전, 여섯 살 연하인 지금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의 힘은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남편의 외도로 집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오직 그림에만 매달리며, 더러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점점 더 원숙미를 더해 가는 그림에 비례해 몸무게 또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몇 년을 그런 악순환의 되풀이 속에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더는 버틸 자신이 없노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편지 속에는 옛날의 그가 아니었다. 삶에 대한 눈은 긍정적으로 열려 있었다. '모든 걸 놓아 버리니 그렇게 마음자리가 편할 수가 없다'는 것이며, '너무 쥐고 있어서 그렇게 힘들었는데 그걸 모르고 여태껏 살아왔으니…' 마치 한 소식을 얻은 듯한 내용들로 편지는 채워져 있었다. 다시 그녀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대화나 상대방에 대한 이해 없이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는 상대가 벽처럼 느껴지더라고. 그래서 먼저 대화의 문을 트기로 마음먹으면서 "지금까지의 생활에서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100일 동안 부처님 전에서 서로를 참회하기로 하자"고 남편도 쉽게 동의를 해 그 약속은 지켜졌다. 한창 마음이 뒤끓을 때는 세상은 온통 암흑 같게만 느껴지고 그 어떤 경구나 법문을 들어도 그 때 뿐, 생활은 늘 절벽에 매달린 것만 같았다고 했다. 스스로의 마음을 고쳐 먹고 나서 하찮은 사물에도 비로소 눈길이 가게 되더라는 것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전화를 돌렸다. 목소리는 너무나 밝았고 예전의 그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는 내 가슴 깊숙이 밝은 햇살처럼 흘러 들었다. 온 세상이 다 환해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