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17

편집부   
입력 : 2014-06-02  | 수정 : 201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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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자성을 밝혀야

”우주에 충만한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려면 자리를 청정히 해야 한다. 먼저 내 마음 속에 있는 자성을 알아 공경하여 그 자리를 밝혀야 한다. 기적이 고마운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자성이 밝혀진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 주위가 고마운 것이 아니라 내 생명의 실상인 자성이 밝아져서 광체(光體)가 일어난 것이 고마운 것이다. 내가 광체이므로 평범도 기적도 광선(光線)으로 나타난다. “(‘실행론’ 제2편 제2장 제5절 나)

(콩트)
몸은 마음 따라 움직인다

버스에서 내린 도로에서부터 경마장까지 이어진 길가에 서 있는 가로수는 유난히 촘촘해 보였다. 1킬로미터 남짓 연결된 길에 메타세쿼이아가 줄지어 서 있는 모양새는 터널을 연상케도 했다. 양쪽으로 펼쳐진 논을 가로질러 섬처럼 들판 가장자리 산 중턱에 자리잡은 경마장으로 가는 길의 메타세쿼이아를 볼 때마다 순보씨가 받는 느낌은 늘 달랐다. 평범한 가로수라기보다 여느 마을 앞을 지나는, 고속도로변에 설치된 방음벽을 연상케 할 때가 비교적 많았다. 잔뜩 기대했던 바를 이루지 못해 실망하고 돌아서던 때가 그만큼 많았던 탓일지도 모른다.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할세라 은폐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이리라. 반면 원형의 경기장에서 거사를 치를 장군을 맞이하는 호위무사들의 행렬 같아 보인 적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뿐이었다.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10여 킬로미터 위쪽에 있는 자동차전용도로를 통해 드나들 때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감정이다. 연인이 사랑을 나누었던 것처럼 달콤한 이야기가 흐르는 가로수 길은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 정도로 치부해버린지도 오래됐다.

순보씨는 비에 젖어 풀이 다 죽은 베옷처럼 허물허물 해진 몸을 간신히 가누며 한 발 한 발 경마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새벽인력시장에서조차 픽업되지 못한 몸을 이끌고 일당이라도 건져볼 심사로 경마장을 찾아가는 중이다.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감이 마음을 더 주눅들게 해서 몸을 흐느적거리게 했다. 죽지 못해서 살아야 하고, 살아 있기에 죽을힘을 다해 하루 하루를 연명해야 하는 얄궂은 운명을 타고난 듯해 자포자기를 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쟈는 걱정하지 말그라. 소띠니까 오십 넘어마 지 일 알아서 하고, 돈 걱정 안하믄서 살게 될끼라.”

어릴 때 어머니와 그 누군가가 나누었던 소리를 귀담아 들어 놓은 터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말을 신봉까지 하지는 않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일확천금을 거머쥐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귀담아 들었던 터라 순보씨는 ‘돈 걱정 안하면서 살게 될 거’라는 말을 쉬 내려놓지 못했다. 믿기도 그렇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행여나 하며 기회만을 보아온 것도 사실이다. 순보씨가 경마장을 찾는 이유도 실낱같은 희망일지나마 기회가 한 번은 자기를 찾아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나름대로의 얄팍한 믿음이 있어서였다. 그럴 때마다 허영에 사로잡힌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이 아리면서도 허전한 것은 또 어쩔 수가 없었다. ‘선과 악을 지은 대로 고와 낙을 받는다’는, 어디서 주워 들었던 이 한마디가 순보씨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일쑤였다.

‘김유신과 천관사’ 이야기가 순보씨의 머리를 스친 것은 그 때였다. 젊은 시절 혈기 왕성했던 청년 유신은 한때 천관녀라는 기녀를 좋아해서 매일처럼 그녀가 있는 기방을 드나들었다. 그 사실을 안 어머니가 하루는 아들을 불러놓고 엄하게 타일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생각은 않고 매일같이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기방을 드나드는 것을 자제했으면 한다는 절박하고도 간곡한 소원을 담은 주문이었다. 어머니의 말을 새겨들을 수밖에 없었던 청년은 다음날부터 술 마시기를 자제하면서 천관녀 찾아가는 것을 자제했다. 그러던 하루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 상태에서 집으로 가려고 말 잔등에 올라탔다. 그런데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말은 잔등에 올라탄 주인이 술을 마시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천관녀가 있는 기방으로 발걸음을 했다. 이윽고 말 때문에 천관녀를 만나게 된 유신은, 반색을 하며 반기는 천관녀와 반대로 정신이 번쩍 들면서 어머니가 소원이라며 당부했던 바를 상기하면서 단숨에 칼을 빼들고 말 목을 내리쳤다. 그 일이 있은 후 유신을 아예 볼 수 없었던 천관녀는 사무치는 그리움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훗날 김유신은 이날의 일을 상기하면서 천관녀의 넋을 달래주기 위해 천관사를 세웠다는 이야기다.

순보씨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메타세쿼이아 한 그루를 의지해 등을 기댔다. 축 쳐진 몸은 이내 메타세쿼이아 줄기를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손쓸 겨를도 없이 메타세쿼이아 밑동까지 미끄러져 내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노동판에서 잔뼈가 굵어 웬만한 충격에는 단련된 몸이라지만, 워낙 몸에 붙은 살이 없어 엉덩뼈에 금이라도 간 듯 아리고 아팠다. 일당이라도 건져볼 심사로 경마장을 찾아가던 중에 당한 변이라 걱정이 앞섰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사람이 다치기라도 해서 몸져눕기라도 한다면 이만저만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땅에 붙은 엉덩이를 뗄 수가 없었다. 따끔따끔한 통증을 못 이겨 손으로 엉덩이를 감싸 안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터널처럼 우거진 메타세쿼이아로 뒤덮인 하늘은 보이지 않고 눈앞에 펼쳐진 노란 장막 주변으로 아지랑이만 아롱거릴 뿐이었다. 정신까지 몽롱해지는 듯 하더니 이내 눈이 스멀스멀 감겼다.

청년 유신을 잔등에 태운 말이 주인의 마음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가물가물 보였다. 술에 취한 유신이 천관녀가 있는 기방으로 갈 엄두를 내지 못해 갈팡질팡 하고 있을 때 말이 주인의 마음을 먼저 알아차리고 천관녀가 있는 기방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유신이 칼을 빼들고 말 목을 내리치려는 찰나 화들짝 놀라 눈을 뜬 순보씨는 꿈인 듯, 생신 듯 너무나 또렷하게 보아 버린 그 광경에서 한동안 헤어날 수가 없었다. 엉덩이 쪽이 아파 몸부림을 치다가 눈을 뜨기는 했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이 알아서 몸을 움직이는구나 하는 알음알이를 얻었다. 하릴없을 때마다 경마장을 찾아드는 자신이 한심스럽게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그 때다. 유신은 말 목을 베었다지만 자기는 발목을 끊어버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치밀어 오르면서 눈물도 주룩 흘러 내렸다. 자신이 없었다. 몸 하나를 믿고 의지하면서 행여나 아프기라도 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삶인지라 발을 잃어버리면 죽은목숨에 다름아니라는 생각이 미치자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며 도리질을 했다.

순보씨는 “만약 재보 탐하는 자/재보 구할 마음발해 그 재물을 경영하는/행 지음과 같으니라”고 들었던 말을 되새김하면서 그동안 공허한 믿음으로 갖고 있었던, 요행을 기다리던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 마음을 바로 쓰고, 열심히 노력해야 잘살 수 있는 이치를 왜 여태 몰랐을까 하는 회한이 밀려들면서 부끄러운 마음까지 들어 고개를 떨구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몸이 반응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어리석음의 뉘우침도 한꺼번에 엄습해 왔다.

순보씨는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치고, 한 손으로는 땅을 짚고 메타세쿼이아에 기댄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간신히 발걸음을 해서 버스가 다니는 도로변에 다다르자 터널처럼, 방음벽처럼 하늘을 가리고, 길가를 가리고 있던 메타세쿼이아가 하나 둘 씩 물러나며 하늘이 열리고, 들판이 보였다. 요행을 바라던 허영을 내려놓고 나니 그동안 닫혀 있던 세상이 열리는 듯 했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