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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부족해도 해낼 수 있습니다

편집부   
입력 : 2014-03-17  | 수정 : 201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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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일체 모든 것에 긍정적 생명가치를 부여하게될 때 완성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입니다. 나는 누구인지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인과의 진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가 각각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마다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전체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족할 줄 모르고 마음에 여러 갈등이 시시각각으로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그리고 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와중에 진리의 법신부처님과의 만남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내면의 긍지와 가치를 되찾아 줄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의미심장한 만남을 통해 저평가 되었던 자신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내면적 힘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닦고 밝혀야 할 다양한 마음공부의 과정과 방법을 시도해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 현실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삶의 마라톤에서 유리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더 크고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은 현실에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할 때, 그리고 아무런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만날 때 그만 좌절해 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성향을 가진 현실적인 사람을 불교에서는 중생이라고 부릅니다.

이같이 냉철해 보이지만, 이기적이고 현실적이며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중생으로서의 현대인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진리와의 만남입니다. 진리와의 만남은 곧 '변함이 없이 참되고 진실하고, 그래서 우리를 속이지 않는 절대가치'와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만남이라는 사건은 우리의 삶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게다가 어떠한 대상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질과 깊이가 결정됩니다. 물가나 수맥에 가깝게 뿌리를 내리는 나무는 잘 자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물이 하나도 없는 척박한 땅에 나무를 옮겨 심으면 아무리 힘을 기울이고 노력해도 시들어 버릴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따라서 나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장과 변화의 자양분을 제공하는 곳 가까이에 우리 삶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판단이야말로 진정한 지혜가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때로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리 치명적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들에 마치 목숨을 걸듯 덤벼들 때가 있죠. 그와는 달리, 어떤 하나에 우리 삶이 흔들리거나 심지어 무너지기도 하며 또는 지탱하게도 하는 마치 주춧돌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 무엇이 우리 삶에는 있습니다. 만일 주춧돌이 흔들리면 집 전체가 흔들리게 되고, 이 돌이 튼튼하면 집 전체가 튼튼하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 삶에도 그런 주춧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은 열린 가능성입니다. 내가 마음을 어떻게 먹고, 쓰느냐에 따라 마음먹은 일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게 됩니다. 행복해 질 수도 있고, 불행해 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뜻에서 회당대종사는 인과법칙으로써의 진리의 수승함을 강조함과 동시에 진리의 일상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평범한 삶 속에서 꾸준한 신행을 통해서 보여지게 되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진리는 특별한 것이 아닌 일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깜짝 놀랄만한 불가사의한 기적의 모습이 아닌 평범하지만 잔잔한 일상이 바로 진리의 진면목입니다. 밤과 낮이 반복되고, 사시사철이 순환하는, 어떻게 보면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듯 보이는 이 모습이 진리의 참모습입니다. 회당대종사는 인과의 진리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실과 아울러 '내가 선악 지은 대로 고와 낙을 받게 되는' 적용의 엄정성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행동하는 인격입니다. 움직이지 않고는 작은 개울도 건너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행동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불교를 신행하는 목적은 내 스스로가 부처님을 닮아 가는 수행과 불공을 통해 부처다워지는 성불에 이르는 것입니다. 수행 즉 부처님을 닮아 가는 과정도 또한 몸, 입, 마음의 세 가지 활동으로 완성됩니다. 이러한 몸, 입, 마음의 활동은 나의 선택에 따라 내 삶이 미혹하게 되는 원인이 될 수도 있고, 깨달아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바른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습니다.

이 선택에서 신행자가 스스로의 몸, 입, 마음을 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악용했을 때는 그 활동을 신구의의 삼업을 짓는다고 말하게 됩니다. 반면에 성불하기 위한 바른 수단으로 옳게 활용했을 때, 그 수행을 신구의의 삼밀수행이라 부르게 됩니다.

인간인 우리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만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 그저 그렇게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가 되는 길을 따라 부처가 될 수 있도록 닦아야 합니다. 그 길은 좀 부족해도 누구나 해 낼 수 있습니다.

밀각심인당 주교 수각 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