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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너 있다

편집부   
입력 : 2014-02-27  | 수정 : 201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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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너 있다.' 예전 어느 TV드라마에서 젊은 연인이 사랑을 고백할 때 했던 차원 높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당신이 내 마음 속에 깊이 들어와서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요, 내 삶의 많은 부분에서 당신이란 존재가 나를 흔들고, 지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에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품격 있는 사랑고백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법과 무상의 이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뼈와 터럭과 살은 다 땅에 돌아가고 피와 눈물과 진액은 다 물에 돌아가고 따뜻한 기운은 불에 돌아가고 움직이는 힘은 바람에 돌아가서 사대가 각각 떠나고…." '진각교전' 열반해인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과 육신이라는 것은 무상합니다. 덧없이 흘러가는 무상한 가운데 우리의 존재는 연기의 이치에 의해 끊임없이 생사를 거듭하면서 윤회합니다. 이를 부처님께서는 생사고(生死苦)라고 하셨고 고해(苦海)라고도 표현하셨습니다. 무시광대 겁으로부터 금일에 이르기까지 내 몸이 생사를 오가며 땅과 물로 돌려보낸 뼈와 살, 피와 눈물은 얼마나 많으며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잡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이 과거 오랜 세월동안 생사를 윤회하면서 몸에서 흘린 피는 너무 많아서 저 항하의 물이나 사방 넓은 바닷물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너희들은 과거 오랜 세월동안 일찍이 코끼리로 태어났을 적에 귀, 코, 머리, 꼬리, 네 발을 잘렸었나니 그 피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혹은 말, 낙타, 나귀, 소, 개와 그 밖의 많은 짐승들의 몸을 받아 귀, 코, 머리, 발과 온 몸을 베였으니 그 피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 너희들은 과거 오랜 세월동안 혹은 도적에게, 혹은 남에게 해침을 당해 머리, 발, 귀, 코를 베이고 온 몸이 잘렸으니 그 피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너희들은 과거 오랜 세월동안 몸이 허물어지고 목숨이 끝나 묘지에 버려졌으니 그 때 흘린 고름과 피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혹은 지옥, 축생, 아귀에 떨어져 몸이 허물어지고 목숨이 끝나면서 흘린 피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시며 끊임없는 생사의 고통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사의 윤회 속에서 우리는 부모님의 죽음을 비롯한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겪으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요? 그 양은 큰 바다의 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남긴 뼈와 터럭과 살도 산하대지를 덮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땅과 물과 불과 바람과 허공과 식이라는 육대의 연기로써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는 무시광대겁으로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살과 피가 토양이 되고 수분이 되어서 식물의 양분이 되었고, 식물과 열매는 나를 포함한 또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었으며, 이 생명체 또한 인연이 다하면 다시 육대로 흩어지는 생태계의 순환 즉 윤회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나'라는 존재는 '너'의 피와 살을, 즉 너의 희생을 통해서 존재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너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온전히 나라고 할 수 없으니 무아(無我)라고 하셨고, 상대를 나와 같이 생각함을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라는 말속에는 하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무아에 어두워서 탐진치로 말미암아 몸과 입과 뜻으로써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라는 존재는 이처럼 육체적, 물질적인 요소만이 연기하여 생사윤회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의 몸과 입과 생각의 모든 행위가 상대방에게 때로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어 지워지지 않고 아뢰야식에 깊이 저장되어 다시 상대방에게 되돌려 줄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업(karma)의 윤회입니다. 물론 상대방에게 베푼 나의 자비로운 행동과 고운 말, 그리고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도 역시 상대의 가슴속에 감동으로 젖어 들어서 언젠가 보은의 결실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너의 마음에는 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도 담겨 있지요. 뿐만 아니라 온 주주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와 나는 둘이 아니고 우주와도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을 불이법(不二法)이라 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업의 윤회가 있고 이 또한 인과응보의 법칙을 따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신구의 삼업을 짓지 말고 삼밀을 행하여야 합니다. 회당대종사님 말씀 가운데 우리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외우는 것이 있습니다. '상대자의 저 허물은 내 허물의 그림자라.' 이 말씀 또한 '너'는 또 다른 '나'라는 무아의 이치와 인과의 이치를 함께 함축한 법어입니다. 우리 중생은 본능적으로 나와 남, 나의 가족과 너의 가족,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을 구별하지만,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본질적으로 남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티베트 불자들은 항상 모든 존재는 나의 부모요, 형제자매라는 생각을 가지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과거 오랜 세월동안 언젠가 한번은 나의 부모였고 형제자매였으며 미래의 언젠가는 나의 부모와 형제자매가 될 것이라는 연기의 이치를 깨닫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만나는 모든 이웃들은 결국 나의 부모, 가족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에 대해 자비심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초기경전 '숫타니파타' 중 '자비경'의 시구에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태평하라, 안락하라. 어떠한 생물일지라도 겁에 떨거나 강하고 굳세거나 그리고 긴 것이건 큰 것이건 중간치건 짧고 가는 것이건 또는 조잡하건 거대한 것이건,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또는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거나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아끼듯이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내라…." 부처님의 이 시구의 말씀처럼 우리 스스로가 무한한 연기의 이치를 통찰하지 못하고, 자비행으로 이어가지 못한다면 부처님의 깨달음은 결코 나의 것이 될 수 없고 공염불에 그칠 것입니다.

진언행자 여러분! 지금 바로 당신 앞에 서있는 사람이 비록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관계가 아닐지라도, 또 다른 나임을 인정하고 '내 안에 너 있다'라는 고백의 의미로 자비심 가득 담긴 살인미소를 힘껏 날려보내 보심이 어떨런지요! 감사합니다.   

daewon.jpg 대원 정사·선혜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