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에서 배우고 깨닫는다 6

편집부   
입력 : 2014-02-17  | 수정 : 201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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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보리밟기를 생각하며


내가 자란 시골에서는 해마다 이맘때쯤 보리밟기를 하곤 했다. 보리 싹이 움틀 무렵에 행해지던 겨울철의 연례행사였다. 보통 가족들이 함께 보리밟기를 했지만, 더러는 봄방학 때 학생들을 동원한 대규모의 보리밟기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아마 70년대에 시골에서 생활했던 사람이라면 쉽게 그 장면을 떠올릴 수 있으리라. 당시 보리는 중요한 양식으로서 대부분의 작물과는 달리 가을에 씨를 뿌려 이듬해 초여름에 수확하는 곡물이었는데, 늘 양식 부족으로 곤란을 겪었던 많은 농부들이 빈 밭에 보리씨를 뿌렸었다. 그런데 움트기 시작하는 보리를 무참하게 밟다니…, 이유가 있다. 추운 날씨 때문에 보리밭이 얼어서 부풀어 오름으로써 보리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또한 보리 잎에 상처를 주어 웃자람을 억제하고 생리적으로 내한성(耐寒性)을 높이기 위함이다.

보리에게 이 작업은 시련의 기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시련은 결코 보리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땅에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게 함으로써 탈 없이 겨울나기를 하게 한다. 보리는 잘 밟혀야 쑥쑥 자란다. 마치 시련을 겪은 사람이 더욱 단단해지듯이.

보리밟기를 하는 동안 봄이 오고 있음을 암시하는 또 하나의 전령사가 눈 덮인 숲속 그늘에서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새하얀 눈얼음을 뚫고 고개를 내미는 노란 복수초(福壽草)이다. 눈 속에서 피는 연꽃 같다하여 설련(雪蓮)이라고도 하지만, 복과 장수를 가져다주는 꽃이라는 복수초가 정식 이름이다. 서양에서는 아도니스(adonis)라 한다. 미소년 아도니스가 멧돼지에게 공격당하여 아프로디테의 품안에서 숨을 거두는데, 그때 흘린 피가 꽃으로 변하였다는 그리스신화에 뿌리를 둔 이름이다. 다만 우리 땅의 복수초와는 달리 서양의 것은 아도니스가 흘린 피처럼 빨간색이란 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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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눈 더미를 뚫고 마침내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 복수초. 모진 겨울 추위와 사람들의 발 세례를 견딘 보리는 5월쯤이면 그림 같은 청보리 밭으로 거듭 태어날 것이다. 성과 뒤에는 이처럼 시련이 있게 마련이다. 시련이 있기에 그 성과는 더욱 빛난다. 삼라만상은 저마다 하나씩 씨앗을 품고 있다.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면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의 씨앗이 싹을 틔우지 못한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려면 캄캄하고 차가운 흙 속에서 참고 견뎌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참고 견디는데 삶의 묘미가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참고 견디어야 하는 사바세계이다. 사바세계는 극락일 수도 지옥일 수도 있는 세상이다. 삶의 과정에서 시련을 인정하고 그를 긍정적으로 해결하는 사람은 끝내 큰 성과를 이룸으로써 극락세계의 열락을 경험할 수 있다. 시련을 인정하지 않고 다가오는 시련에 대해 불평만 하는 사람에게 성과를 기대할 수 없으며 그가 사는 세상은 곧 지옥이다.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보왕삼매론'에 나오는 말씀이다. 회당대종사님은 "체가 굽으면 그림자도 굽는다"라고 법문 하셨다. 그러니 어찌 그림자가 굽었다고 한탄할 것인가? 시련을 불평으로만 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책의 말씀들이다.

불평만 하는 제자에게 스승이 물 사발을 가져오게 했다. 소금 한 줌을 사발에 넣고 저은 다음 제자에게 마시라고 한 다음 물었다. "맛이 어떠하냐?" 제자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아주 짭니다"라고 했다. 스승이 제자를 데리고 호수로 갔다. 호수에 소금 한 줌을 던져 넣고, 짚고 있던 지팡이로 호수를 저었다. 그러고는 호수의 물을 마셔보라고 했다. "맛이 어떠하냐? 짜냐?" 제자가 대답했다. "짤 리가 있겠습니까? 시원하고 맛만 좋습니다." 이에 스승이 제자에게 "삶에서 겪는 고통이 소금 맛이라면 어찌 할 것인가? 작은 사발에 담아 고통을 맛보며 살 것인가, 큰 호수에 담아 고통을 희석시키며 살 것인가? 사발이 되지 말고 호수가 되라"고 했다. 

그렇다. 고통도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진다. 사발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표정은 늘 불만에 가득 차 있다. 고통을 충분히 녹여낼 만한 크기의 마음 그릇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표정은 언제나 밝고 긍정적이다. 그에게 다가가던 고통은 서서히 녹아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추위를 이겨낸 나무가 나이테를 만들고, 상처 난 조개가 진주를 만든다.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는 비바람에 쉽게 넘어지지만 갖은 풍상을 겪은 들꽃은 폭풍우도 견디어 낸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가난했기 때문에 '성냥팔이 소녀'라는 작품을 남길 수 있었고, 못 생겼기 때문에 '미운 오리새끼'를 쓸 수 있었다. 경영의 신(神)으로 일컬어지는 마츠시타는 자신의 성공요인을 가난과 병약함, 그리고 자신의 무지를 꼽았다. 시련과 어려운 형편이나 처지는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축복이요, 기회이지 불평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괴테는 "신은 위대한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먼저 시련을 준다"고 했다. 회당대종사님은 "마장(시련)은 공덕성취 근본이며, 난행고행을 단련하여 몸과 마음을 금강같이 인격완성 하게 하는 제일 좋은 방편이라"고 법문 하셨다. 오늘의 시련이 곧 내일의 도약을 위한 발판이라는 뜻이다.

시련에 대응하는 복수초의 마음이 사발만 했더라면 결코 예쁘고 노란 꽃을 피워낼 수 없었을 것이다. 보리의 마음이 사발만하다면 올여름 결코 황금빛 결실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따라 소금물이 왜 이렇게 짤까? 마음그릇을 키우는 마음공부를 게을리 했음이리라.

dukil.jpg 덕일 정사/보원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