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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편집부   
입력 : 2014-01-29  | 수정 : 201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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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도 물처럼 흘러갔습니다. 이른 아침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에 잠이 깼고 창문을 열고 난분분 쏟아지는 눈을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니 눈발은 그쳐있었고 출근길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직장에서는 적당히 바빴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업무를 마감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빵집에 들러 빵 한 봉지를 샀습니다. 때마침 쏟아지기 시작하는 눈을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본 건 출퇴근 거리가 가까운 저에게는 별로 해당사항이 없는 퇴근 길 교통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눈발을 헤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간단히 집안 정돈을 하고 서가에 앉아서 책을 읽었습니다. 요즘 읽고 있는 책들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3', 공지영 장편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 김숨 소설집 '국수' 그리고 몇 권의 시집들…. 책을 읽을 때는 항상 여러 권의 책을 번갈아 읽는 편입니다. 채움보다는 비움을 지향하며 산다고 자부하지만 어쩔 수 없이 버리지 못한 것이 독서습관에 남아있는 것 같아 마음 한 자락이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딱히 고쳐야 할 습관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한두 시간 책을 읽다보면 아이가 귀가할 시간이 되고 저는 주방으로 들어가 준비해놓은 음식들로 식탁을 차립니다. 딸아이는 밥을 먹으면서 오늘의 일과를 자세히 이야기 해줍니다.

달이 밝은 날이면 집 근처 공원으로 밤산책을 나섭니다. 실핏줄 같은 잔가지만 가득하던 나무들이 모처럼 눈옷을 입고 있으니 한결 봐 줄만합니다. 십 년 넘게 드나든 곳이니 제 손바닥처럼 환한 곳이지만 새로 낯을 익힌 듯 나무 한 그루, 시든 풀꽃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며 찬찬히 걷습니다. 겨울 숲은 지난 계절의 기억을 안고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면 저녁 무렵에 읽었던 조용미 시인의 시편들을 되뇌어 봅니다. "기억은 영상 4도에서 가장 무겁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온갖 기억의 파편들은 굳어버리지 않고 얼음장 밑에서 헤엄쳐 다니며 살 수 있습니다. 기억은 지구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입니다. 그러므로 지구를 기억의 행성이라 부르지요."('기억의 행성' 부분) 시인은 또 다른 시 '묵백(墨白)'에서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오래 전 내가 살았던 삶은 지금의 삶과는 너무 다르지만 결국 같은 것을, 당신과 내가 다음 생에도 무언가 이상한 일을 반복하리라는 것을. 그러기 위해 꼭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너무 다르지만 결국 똑같이 하루 하루가 이렇게 저렇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물론 제게도 모란꽃 같은 시간의 기억도, 또는 나를 사로잡는 운명이 버거워 몸부림치던 날들의 기억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들 다 견디고 나서 돌아보니 될 수 있는 한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자는 것이 제 삶의 지향이 되었습니다. 정말로 바람대로 할 수 있다면 스콧 니어링을 쫓아 버몬트 숲 속으로 들어간 헬렌 니어링처럼 살고 싶지만 그것은 어쩌면 요원한 꿈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꿈이라도 꿀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행복이란 단어를 떠올리니 언젠가 TV에서 봤던 방송인 김제동의 어록이 생각납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커플이라서 행복하고 솔로라서 쓸쓸한 게 아닙니다. 행복과 불행은 우리가 결정합니다."

그가 출연하는 예능프로를 보며 웃고 있다가 그 말 한마디가 가슴을 후려쳤습니다. 그럼요.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하루 하루를 물처럼 흘려보내며 친정엄마 혹은 시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구수한 된장에 시래기 풀어 된장국 한 그릇 끓여 자식 입에 넣어주는 것도 행복이고 어쩌다 가끔 이제는 누이 같아진 오래비 같아진 부부가 마주앉아 좋은 안주에 술 한 잔 나누는 것도 행복이고 그런 것이겠지요. 때로 내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어도, 혼자가 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디 삶이란 그런 것인걸요. 그래도 순간순간 행복연습을 하면서 살다보면 어느새 행복해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그것이 해인(海印)으로 향하는 첫걸음이 아닐까 살며시 갸웃거려봅니다.

김혜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