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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대도 6

편집부   
입력 : 2014-01-29  | 수정 : 201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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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에 눈뜸은 '은혜'에 눈뜬다는 의미


이번 시간에는 무상(無相)사상과 은혜(恩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금강경'의 무상사상은 연기설이 그 바탕이 되어있다. 이 세상 만물이 서로 의지하여 성립되고 존재하고 있기에 고정불변의 상을 가질 수 없으며, 만약 상을 가진다면 참된 보살이라 할 수 없다라고 설하고 있다. 이 상의 대표적인 것으로써 사상(四相)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들고 있다.

무상과 함께 이 무상을 닦음으로써 도달하는 실천적인 경지를 무아(無我)라고 할 수 있다. 이 무아의 가르침은 불교 삼법인의 하나로써 등장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 종단의 실천참회의 맨 앞줄에 등장하고 있다. "무시광대 겁으로부터 금일에 이르기까지 무아에 어두워서 탐심과 진심과 사견으로 말미암아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은 죄를 다 드러내어 참회하나이다.(중략)" 그렇다면 무아에 어둡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모두 연기적인 관계 위에서 성립되므로 그 속에 '나'라고 할 만한 실체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나라고 하는 존재는 모두 모든 이들의 은혜로 이루어져서 그 은혜를 빼버리고 나면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이처럼 우리들 자신은 은혜로 이루어져서 '나'라고 할 만한 어떤 것도 내세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무아'에 대한 자각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몸은 부모의 정혈을 빌린 것이며, 갓난아기 때는 부모의 젖을 먹고 지극한 보살핌으로 자랐고, 때로는 다른 이가 애써 농사지은 농산물을 먹고, 때로는 다른 축생의 살[고기]을 먹으며 이 몸을 길러왔고, 우리의 정신은 부모와 선생님들과 인연 있는 이들로부터 교육을 받아서 형성되었고,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살림살이와 옷과 승용차와 그 외의 어떤 것들도 내가 직접 만든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 다른 이들이 애써 만든 것을 약간의 재물로 구하여서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같은 사실을 엄밀하게 검토해보면 '나'라고 할만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고, 모든 것이 은혜로만 가득한 '무아의 나'라는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무아의 이치이다. 결국 사람들은 이 같은 진실에 눈뜨지 못하고, 모든 은혜 없이도 자신 스스로 홀로 존재한다고 하는 착각에 빠짐으로써 탐욕의 마음을 일으키고,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고, 무아의 이치에 어두운 어리석은 삿된 소견을 내어서 몸과 입과 뜻으로써 은혜를 배반하는 모든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진각종에서 말하는 '무아'에 눈뜬다는 의미는 바로 '은혜'에 눈뜬다는 의미가 된다. 종조 회당대종사께서도 이 같은 무상(無相)과 무아(無我)의 연기적 이치를 깨달으시고, 은혜로써 회향을 하셨다고 할 수 있다. 무상과 무아는 다소간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측면이 있지만 이것의 실천적 회향인 은혜(恩惠)는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사대은혜의 보답을 통하여 무상과 무아의 연기적 깨달음은 현실에서 구체화되고 실천되어 생활 속에서 구현되어지고 승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대은혜는 네 가지 큰 은혜로써 부모의 은혜, 중생의 은혜, 국가의 은혜, 삼보의 은혜를 말씀하셨다. 부모의 은혜는 내 존재에 대한 기본적인 감사함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은혜는 부모로부터 조상님에게 까지 이어져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종조님께서는 조상은 한 가정의 뿌리와 같고 자손은 그 뿌리에서 나온 열매와 같기에, 열매가 잘 되려면 뿌리인 조상이 해탈되고 부처님께 가까이 가야 한다고 설하셨다. 이런 이유로 종단에서는 조상님 추복불공을 통하여 조상님이 이고득락 하시고 부처님세상으로 왕생하기를 항상 서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가르침은 모든 불교에서 기본적으로 공통되어 있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한 프랑스 플럼빌리지의 틱낫한 스님의 법문을 소개해 볼까 한다.

"모든 것이 그물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내 속에는 모든 조상들과 미래 세대가 공존해 있습니다. 당신은 많은 승객을 태운 비행기의 조종사와 같습니다. 당신은 많은 주의와 책임을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란 '모든 것과 분리된 나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조상과 미래 세대에 영향을 미칩니다. 당신의 자녀를 위해 수행하십시오. 수행은 책임입니다. 피붙이 조상과 영적 조상은 우리에게 지혜를 물려주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용법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딛는 모든 발걸음과 내가 쉬는 한 숨 한 숨이 조상과 미래 세대를 위한 공양이 되도록 합시다."

이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은 종조님의 말씀과 그대로 통하고 있다. 종조님께서도 "부모지심 참회하면 자손창성 충효하고, 자손지심 참회하면 선망부모 해탈한다(무상게송)"라고 말씀하시고, "부모의 작은 허물이라도 열 자식 백 자손에 미치니 육행으로써 허물을 고쳐야 한다(실행론 64쪽)"라고 말씀하신 것은 부모와 자녀가 인연과 업으로 이어져 있는 까닭에 부모가 참회로써 허물을 고치는데 자녀가 잘 되고 자녀가 참회로써 허물 고치는데 부모와 조상님이 해탈을 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두 번째의 중생의 은혜는 더불어 사는 모든 중생들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 특별히 이익을 주는 일이 없는 것 같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그 속에 알게 모르게 서로서로 무한한 은혜를 주고받고 있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우리들이 향유하는 물질적인 것들의 대부분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며 다른 이들이 노력하여 만든 것을 우리들은 누리고 살고 있다. 재물로 대신 댓가를 치렀다는 이유로 내 것으로 삼지만 그 모든 것들을 생산하는데 든 숭고한 노력은 실상은 재물로 댓가를 다 치렀다고 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이 있다. 다만 편리를 위하여 재물의 가치와 맞바꾸어 사용하지만 모든 중생들의 땀과 노력이 없다면 우리들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들은 내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필자가 가끔 중생의 은혜를 실감하는 예를 말씀드리면 시골의 깜깜한 밤길을 차로 달리고 있을 때 차가 한 대도 없으면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때 저 반대쪽에서 차라도 한 대 보이기라도 하면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모른다. 그 순간 정말 더불어 사는 중생의 은혜가 무엇인지 실감이 난다. 그냥 저 상대방이 같이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세 번째의 국가의 은혜는 나라를 잃어본 우리 국민은 국가의 은혜에 대해 나름대로 피부로 느낀 바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티베트 같은 나라는 나라를 잃고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우리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있다. 나라 없는 국민의 설움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측면이 있다. 우리에게도 그 같은 수난의 역사가 있었기에 종조님께서는 불교를 통한 자주정신의 함양을 더욱 강조하셨다고 할 수 있다. '진각교전' 서문인 '불교는 우리의 풍토성과 혈지성에 맞는 것'이라는 글에서 "자주국가를 확립하는데는 먼저 국민의 자주성이 필요하며, 그 자주성을 함양하는 데는 과학보다도 정신적인 영역에서 자력교와 타력교를 잘 분별 선택하여 자력교를 신앙함으로써 일상생활에 자주성을 길러내는 밑받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 같은 종조님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국가의 은혜가 크기에 나라에서 하는 일을 국민이 된 의무로써 힘껏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삼보의 은혜가 있다. 이 삼보의 은혜는 우리들로 하여금 인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바르게 밝혀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커다란 은혜가 있다. 높은 산 위에 올라가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감되듯이, 불법승 삼보의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생사윤회의 인생을 조감할 수 도 없고 고해의 바다에서 고통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오늘의 우리들 자신이 존재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처럼 불법승 삼보의 은혜는 우리들이 인생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우리들의 삶을 복되고 행복하게 이끌어주신 무한한 은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중생이 불법승을 만나는 것은 이 우주의 가장 진귀한 보배를 얻는 것과 같으므로 '삼보'(세 가지 보배)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들은 이 같은 삼보의 은혜로써 인생의 의미를 알고 고통을 멀리 벗어나서 참으로 복되고 해탈된 삶을 살아가게 되었기에 삼보의 은혜는 그 어떤 은혜보다도 큰 은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상과 무아의 진리에 바르게 눈뜸으로써 우리들 삶의 근원에 이 네 가지 큰 은혜가 있음을 알고, 보은을 기치로 하여 은혜 갚는 삶을 사는 것이 상없는[無相] 삶이요, 무아(無我)의 봉사하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이치를 볼 때 종조님의 깨달음이 사대은혜로 회향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bupkyung.jpg 법경 정사 / 시복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