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14

편집부   
입력 : 2013-12-03  | 수정 : 2013-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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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일당천만(心一當千萬) 질백화단청(質白畵丹靑)


"본래 진각심인이 구족한 것이 본각(本覺)이다. 본각을 구족할지라도 깨치지 못하면 범부요, 비록 깨침이 있을지라도 닦지 못하면 또한 범부이다. 비록 본래 금(金)일지라도 백 번이나 풀무에 단련하지 않으면 진금(眞金)이 되지 못하니 한 번 진금만 되면 다시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본각은 허공과 같고 맑은 거울과 같다. 우리가 닦아서 본래 안과 밖이 없는 참마음을 이루는 것도 이와 같으니 이것을 시각(始覺)이라고 한다. 본각과 시각이 구경에 둘이 아님을 깨닫는 것을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하고 위에서 이미 말한 것을 다 깨친 것을 진각(眞覺)이라 한다."('실행론' 제2편 제2장 제2절 가)

"마음 하나 천만을 당적하고(心一當千萬)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質白畵丹靑)."('실행론' 제2편 제2장 제2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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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원 정사



(콩트)
마음을 내면 길은 열린다


"괴물 태풍 하이옌(바다제비) 강타 필리핀 폭풍해일 겹쳐 암흑 속 쓰레기천지, 사체즐비, 굶주림, 치안불안, 약탈공포로 아비규환. 레이테섬 타클로반공항에서는 탈출행렬 장사진……."

연일 신문지상과 방송매체들을 통해 쏟아지는 소식이다. 깨침이 정사는 먹먹함을 느꼈다. 마음은 종잡을 바 없이 흩어지고 생각은 정처 없이 떠돌았다. 간신히 정해 놓은 염송을 마치고 서둘러 종무실로 들어간 깨침이 정사는 텔레비전부터 켰다. 뉴스전문방송채널에서는 역시나 필리핀 태풍소식을 전하고 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신문을 펼쳐도 1면부터 거의 전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필리핀 태풍피해소식을 전하고 있다. 깨침이 정사는 '푸우∼' 하고 숨을 골랐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있다는, 필리핀 재난소식으로 채워진 지면 속에서 연말을 앞두고 나눔활동을 전하는 미담기사 하나를 발견하고 나서야 겨우 숨을 골랐다. 순간 아련한 생각 하나가 깨침이 정사의 머리를 스쳤다. 젊은 시절 친구들과 오지탐험을 갔다 왔을 때의 일이다. 잊혀진 듯 했던 그 일이 불현듯 떠오른 것을 보면 충격과 보람이 그만큼 컸던 탓이었다는 반증임이 틀림없다.

하늘에 맞닿을 듯 높은 고산지대였다. 그 오지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그 상황을 충격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당시에는 그랬다. 텔레비전 여행전문채널 등을 통해 자연다큐멘터리를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그 때까지 보았던 어떤 곳들과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였다. 잦고 거센 바람에 섞여 흩날리는 흙먼지는 눈을 제대로 뜰 수 없게 했다. 숨조차 마음대로 쉴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듯 싶었다. 바람이 잠잠한 찰나의 틈을 타거나 은폐물을 의지해 겨우 몰아서 쉬어야 하는 숨길은 자주 가빴다. 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황량한 터전에 나지막하게 자세를 낮추고 엎드려 있는 듯한 움막은 언제 주저앉을지도 모를 정도로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바람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집이라고 할 수조차 없어 보이는 그들만의 터전은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일행들은 그곳을 떠나올 때 남은 여행일정을 생각해서 꼭 필요한 것만을 뺀 나머지 모두를 남겨 놓았다. 그래도 발걸음은 가볍지가 않아 수도 없이 뒤돌아보며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자생적으로 발생하고 일어난 현상들은 자연스럽게 치유되고 아물기 마련이다. 뭇 생명을 가진 유정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처해진 어떠한 조건에서도 생활을 유지하고 견딜 수 있도록 적응하면서 상황을 만들어 가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뜻하지 않게 당하거나 불가항력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황망한 순간의 위기 앞에서다. 필리핀이 지금 그렇지 않은가 싶다.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깨침이 정사는 온갖 상념들을 멈추려고 육자대명왕진언을 염송했다.

당시 오지탐험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그곳에 보낼 갖가지 물건들을 모으자고 의기 투합했다. 주변 사람들과 이웃, 심지어 직장이 있는 친구들은 직장의 동료들까지 동참하게 했다.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고 의기까지 투합 된다면 안 될 일이 뭐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1개월이 채 되지 않아 길이 20피트의 표준형 컨테이너 하나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물건들이 모아졌다. 옷가지부터 음식조리기구, 천막용 비닐은 물론 심지어 노끈 등 직접 눈으로 보고 온 뒤 필요하겠다 싶은 것은 대부분 망라됐다. 문제는 그곳까지 운반할 운송비 부담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궁리 끝에 후원자를 찾아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몇 일이 지나지 않아서 오지에 보낼 물건을 모아두었던 고물상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반가운 소식이 있으니 시간 되는 대로 찾아오라는 말이었다.

"운반비를 부담하겠다는 독지가가 나타났구려. 하늘이 당신들을 돕는 거 같으이. 좋은 일을 하니 좋은 결과가 있네 그려."

"어떤 분입니까? 감사표시라도 해야될 텐데."

"그거는 절대 묻지마. 그 분은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고 했네. 괜한 소문이라도 돌기만 하면 당장 결심을 철회하겠다고 까지 했네. 그러니 그 분을 알려고 하지말고 당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만 추진하시게."

"이렇게 고마울 때가 있습니까? 정말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사장님 고맙습니다."

"내가 무슨……."

"사장님 덕분입니다. 물건 모을 장소도 빌려주시고, 이렇게 운송비를 부담하겠다는 후원자까지 찾아주셨으니 사장님이 일 다하신 겁니다."

"별말씀을 다하시네."

깨침이 정사는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낀다. 마음을 일으키고 의지를 세워 밀어 부치니 동조하는 이들이 생기면서 하고자 했던 일이 순탄케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게다가 환희까지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는 힘들고 애태웠던 모든 과정을 까맣게 잊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마음을 그렇게 모두 비우고 나니 머릿속까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는 믿음과 의지까지 생겨났다. 달리기 선수가 새로운 각오로 출발선상에 서는 설렘처럼…….

깨침이 정사는 필리핀 태풍재해 소식을 접하면서 불현듯 떠오른 오지탐험과 지원활동 경험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새로운 발심을 했다. 먹먹하기만 하던 마음을 진정시킨 채 지금은 비록 한 사람의 힘이지만 발심을 하는 순간부터 일은 시작된다는 믿음이 용솟음쳐 올랐다.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행위가 하나라는 생각이 든 것은 그 때다. 마침 텔레비전에서는 모금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과 방송국을 중심으로 한 모금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