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로 본 회당사상 5

편집부   
입력 : 2013-12-03  | 수정 : 2013-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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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콩과 검은콩 


울릉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대종사는 집안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계속 공부를 하였다. 특히 의생(醫生)공부에 관심을 기울였다. '방약합편'(方藥合編) 등의 의서를 읽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부친은 아들의 의생공부를 반대하였다. 그것을 깨달은 대종사는 학교 공부를 계속할 뜻을 세웠다. 그렇지만 집안 사정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 때 집안에서 청년 덕상의 혼사 일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20(1921년)세에 18세의 배씨 규수와 결혼한다. 배씨 가문은 일찍이 울릉도에 입도(入島)하였다. "고종 27(1890)년에 대구인(大邱人) 배상삼(裵尙三)을 도수(道首)로 삼아 도장(島長)을 대리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배씨 가문은 이때쯤 울릉도에 정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종 건양원년(建陽元年·1896년)에 배계주(裵季周)가 도감(島監)에 임명되고, 광무(光武) 4(1900)년 울릉군으로 개칭되어 군수가 되었다. 배계주는 광무 7(1903)년까지 군수를 하다가 그만 두었다. 이로 보아서 울릉도에서 배씨 가문은 명문부자 가문이었다. 청년 덕상의 사람됨에 신부 집안에서 결혼을 추진하였다. 신부 집안에서 농을 맞추는 등 혼사의 성사에 매우 기뻐하였다.  

대종사는 결혼 이듬해 21(1922년)세에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대구로 떠난다. 결혼 7개월만에 혼자 처가의 도움을 받아서 대구 경북중학교에 원서를 냈다. 그러나 시험당일 설사증상으로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였다. 다시 계성학교에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입시시험이 4월 6일이고, 입학이 4월 7일이었다(학적부는 4월 3일). 신입생은 157명이었다. 동갑내기 삼촌도 따라와서 같이 학교에 다녔다. 그때가 바로 3·1독립운동이 일어난 후였다. 계성학교도 예외 없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학교의 교육활동이 원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계성학교 생활은 6개월 밖에 하지 않았다. 그 해 10월 24일 퇴학을 하였다. 퇴학의 사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학교의 퇴학 사실을 부인에게 알리지 않고 바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집안에서는 학교가 휴교하여 퇴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학교의 교무일지에는 휴교 사실이 없다. 아마도 후일 퇴학의 이유를 그렇게 말했을 가능성도 있다. 학교의 교육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학교의 교육에 만족감을 얻지 못해서 퇴학을 하였을 것이다. 역시 삼촌도 따라 갔다. 도일(渡日)에 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며느리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콩 타작을 하는데 대종사는 흰콩을 타작하고, 일본 사람은 검은콩을 타작하였다. 꿈 이야기를 시어머니에게 하였다. 시어머니가 "덕상이가 일본 간다"고 대답하였다. 흰콩, 검은콩의 이미지가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이 이야기로 보아서 도일(渡日)의 사실을 부모님께는 알리고, 부인에게는 모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 건너간 청년 덕상은 동경에서 낮에는 잡 노동을 하고 밤에는 예비학교에 다녔다. 예비학교는 정규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기관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본생활 1년이 되던 22(1923년)세에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일어났다. 관동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도쿄가 있는 관동지방에서 일어난 규모 7.9의 대지진을 말한다. 지진은 가나가와(神奈川)현에서 일어나 도쿄와 요코하마(橫浜) 등 관동지방을 휩쓸었다. 지진발생 후 통신이 두절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 정부는 국민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공작'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조선인이 살인, 방화를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 소문은 커져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또는 "산업시설을 파괴하고 있다." 나아가 "약탈, 강간까지 하고 있다"는 등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자 공공연히 "조선인은 죽여도 좋다"는 발언이 나왔다. 그러자 계엄군과 경찰은 조선인을 무차별 폭행하고 살해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 수가 무려 10만 명에 이르는 참상이 일어났다.

대종사가 귀국 후 가족에게 전한 사실은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저녁식사 후 등교준비를 하는데 집 저 밑에서 불이 솟아올랐다. 동료들과 모여서 상황을 상의하는데 불이 세 집 건너까지 올라왔다. 동료들과 피신하여 학교 담장 밑에 숨었다. 그러자 살던 집은 꺼져버렸다. 이재민수용소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 경비원이 한 눈을 파는 틈을 타서 수용소에서 탈출하였다. 조선인의 무차별 폭행과 살인을 피해서 산으로 도망하였다. 산으로 도망가는 중 삼촌이 따라오지 못하자 업고 도망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 폭행과 살상의 상황이 진정된 후 집에 연락을 취하였다. 식비와 여비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일본을 벗어나기 위하여 니이가다(新潟) 항구로 갔다. 니이가다는 일본 본주(本州)의 중부지방 니이가다현 소재지다. 니이가다현의 동북부의 동해에 면하고 있는 가장 큰 도시다. 그때 니이가다항은 북방의 나라, 그리고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통로였다. 청년 덕상은 여기서 심적인 갈등을 가졌다. 귀국하느냐, 아니면 하와이로 가느냐를 놓고 고민하였다. 그때 하와이로 간 사람도 많았다. 결국 귀국하였다. 이렇게 일본유학은 천재지변으로 중도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종사는 짧지만 일본생활을 통하여 많은 경험을 얻었다. 후일 과학기술과 물질문명 등을 중요하게 여기고 혁신적 사고를 가지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유학이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로 좌절되자 청년 덕상의 마음은 상실감이 매우 컸다. 귀국 후 이러한 심정을 다스리기 위하여 전국을 주유(周遊)하는 여행을 하였다. 평양 을밀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그때의 사정을 말해준다. 팔도를 돌면서 일본생활에서 겪은 나라 잃은 설움과 배움에 대한 열망을 다독이고 새로운 삶을 고민하였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청년 덕상은 우선 면사무소에서 일을 한다. 일본에서 겪었던 경험과 한학의 지식이 면사무소 근무를 가능하게 하였다. 면사무소 근무는 2년 정도 하고 그만 두었다. 25세(1926년)에 규상(圭祥)으로 개명하고, 도동으로 이사하여 학용품 가게를 열었다. 장남[창수·昌銖]이 태어나자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학용품 가게는 기대 이상으로 발전하였다. 포목, 잡화, 미싱 등으로 가계를 넓혀갔다. 이렇게 해서 청년 규상은 사업가로 알려졌다. 이즈음 포항의 사업가들이 울릉도를 자주 왕래하였다. 사업가 규상은 이들과 거래를 하였다. 모두가 대종사의 성실성과 사업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거래를 자청하였다. 특히 그 중에서 포항의 큰 사업가 김두하(金斗河)가 젊은 사업가 규상의 사업능력을 눈여겨보고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마치 형제처럼 교유하게 되었다.

김두하, 김두만, 김두수 삼 형제는 당시 포항의 경제계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김두하(1894∼1957)는 1920년부터 포항상공수산회 조직준비위원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1933년 포항상공회 설립의 발기인이 된다. 그리고 그 해 8월 발족한 포항상공회 초대 및 2대 부회장을 맡는다. 회장이 일본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포항상공회에서 김두하의 활약은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포항상공회가 1954년 포항상공회의소로 재 창립될 때 김두하는 발기인 대표 및 임시의장을 맡아서 산파역할을 한다. 김두하는 젊은 사업가 규상을 매우 크게 평가하고 형제처럼 아끼며 포항으로 이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런데 조부가 몹시 반대하였다. 젊은 사업가 규상은 26세(1927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9세(1930년)에 사업환경이 좋은 포항으로 이사하였다.(4월 3일) 경북 영일군 포항면 포항동(현 南濱洞) 487번지가 포항의 첫 번째 정착지이다. 물론 김두하 집의 일부분이었다. 그만큼 김두하는 젊은 사업가 규상을 크게 도와 주었다. 여기서 대종사는 포항의 유력사업가들과 거래하면서 사업을 확장하여 갔다. 잡화점, 포목, 제과, 그리고 축돈(蓄豚)을 비롯한 가축도 길렀다. 사업활동을 왕성하게 하면서 신용을 중요하게 여겨 신용 있는 사업가로 알려졌다. 그러자 사람들이 찾아와서 교유하기를 희망하였다.

kyungjung.jpg 경정 정사 / 전 진각종 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