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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무범(秋毫無犯)-이 가을에 범하지 말아야 할 것

편집부   
입력 : 2013-10-15  | 수정 : 201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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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변화의 연속과정입니다. 늘 변화한다는 것이 무상의 의미입니다. 인생무상이라는 말을 허무의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을 변하지 않는 실체로 파악하면 오해입니다. 인생은 흐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이루는 중요한 가치인 돈도, 명예도, 권력도, 건강도 내 주변에 잠시 서성대다가 흘러가는 구름과 같습니다. 하지만 내 주변에 이런 것들이 잠시 머무르는 동안에 잘 선용하는 삶은 여법한 인생입니다. 계절도 흘러갑니다. 춥건 덥건 계절을 즐기는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이고, 계절을 투정하며 사는 사람은 못 사는 사람입니다. 좋아 보이는 것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고통, 어려움, 그리고 시련고개도 흘러갑니다. 잘 감당하고 감내하고 인내하며 넘어가면 됩니다. 인생이 흐름임을, 무상임을 알면 겸허해지고 겸손해지고 진리에 수순하게 되며 오만해지지 않습니다.

진리의 진미를 아는 이는 참고 기다릴 줄 압니다. 복된 결과로 이끄는 길은 역설적이게도 복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오해를 합니다. 복된 결과로 이끄는 길은 시원스럽게 잘 닦인 편한 길인 줄 착각합니다. 사실은 시련고개의 힘든 길이 복된 곳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열매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열매는 달콤한데 그 과정은 달콤하지 않는 것이 진리의 모습 아닐까요. 김도 매줘야지요. 기다려야죠. 노동의 고통도 감수해야죠. 공덕이라는 열매를 거두는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보된 안락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 당장 거두려는 게 아니고 장차, 나중에 안락할 것을 바라보면서 지금은 고행 가운데 정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생들에게 수업할래, 나가서 놀래? 라고 물어보면 대답은 뻔합니다. 공부는 어렵습니다. 모두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합니다. 실력 있는 사람,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그러니까 다 포기하잖습니까. 따라서 고행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혜안이 필요합니다. 진리 앞에서 우리가 복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지금 현재 험난하고 힘들고 괴로움이 따를지라도 그 진리의 길을 마땅히 걸어갈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진리의 길은 불편한 선택입니다.  

서원이 큰 진언행자일수록 인내의 깊이도 깊어야 합니다. 좋은 것은 대개 여러 차례의 시도를 통해서 얻게 됩니다. 시도의 횟수가 더해 갈수록 실현가능성은 높아지지만, 실망의 누적으로 인해서 인내심은 고갈되게 되어있습니다. 결국 끝까지 가는 사람이 뜻을 이루게 됩니다. 누가 오래 지속할 수 있겠습니까? 인과의 이치를 증득하고 낙관적인 태도를 가진 지혜로운 사람이야말로, 요행수를 추구하며 비관적인 태도를 가진 탐욕스런 사람보다 월등하게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을은 열매를 거두는 시기입니다. 열매를 거두기 위해 해야할 일은 씨를 뿌리는 겁니다. 열매를 거두고자 하는 사람은 씨를 먹는 게 아니라 뿌리고 심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심어야 할 것을 다 먹어버립니다. 단지 배고프다는 이유로, 아깝다는 이유로 심어야 할 것을 먹어 버립니다. 그러나 지혜 있는 이는 먹어야 할 것과 심어야 할 것을 구분할 줄 압니다. 농부가 다음해의 수확을 위해 뿌릴 씨감자를 고르는 원칙이 있습니다. 씨감자로 쓸 것은 지금 당장 먹을 감자보다도 더 굵고 튼실한 것으로 골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것을 뿌리고 심어야 더 좋은 것을 수확할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에 입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이는 당장의 만족을 위해 먹음직스럽고 알이 좋은 감자를 먹을 것으로 챙겨 놓고, 씨감자는 형편없는 것으로 고르는 우를 범합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완연한 가을입니다. 대체로 동물들은 가을이 되면 월동을 위하여 털갈이를 합니다. 묵은 털이 빠지고 몹시 여리고 가는 솜털이 새로 나오는데 이것을 추호(秋毫)라고 하고 보통 '매우 조금'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가을의 한복판에 서서 진정 추호라도 범하지 말아야 하지만, 부지부식간에 범하고 있는 내 삶의 허물을 살펴봅니다. 중생이기에 허물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힘든 상황일지라도 훼손시키고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를 향한 확신에 찬 서원력입니다. 무조건 승승장구하는 것이 복이 아님을 증득하는 것이 진정한 서원력입니다. 공덕과 복덕은 무조건 잘 되는 것만이 아니라 너무 잘 돼서 오히려 장애가 될 것 같으면 막아 버리고, 유익이 된다면 더 잘 되게 밀어줘서 진언행자로 하여금 여법하게 전인격적으로 그리고 입체적인 삶을 살게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다가올 겨울은 유래 없이 길고 추운 계절이 될 거라는 예보가 나오고 있습니다. 진리를 향한 범(犯)함이 없는 서원력으로 추위를 대비하고, 씨감자를 고르는 지혜로 봄을 준비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수각 정사/ 능인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