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로 본 회당사상 3

편집부   
입력 : 2013-09-02  | 수정 : 2013-09-02
+ -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


회당대종사의 아명(兒名)은 덕상(德祥)이다. 소년 덕상의 마음에는 그 이름처럼 덕이 상서롭게 가득 차 있었다. 그 상서로운 덕이 생각이 되어 시구로 흘러 나왔다. 마음하나[심일·心一]는 '우주의 보편적 생명흐름'을 일컫는다. 마음[心]은 생명흐름이요, 하나[일一]는 보편전일(普遍全一)함을 일컫기 때문이다. 대종사는 나중에 "하나부처님은 시방삼세 하나이라"는 법문을 한다. '하나(부처님)'는 후에 '(대)비로자나부처님'으로 심화되어 간다. 그래서 "비로자나부처님은 시방삼세 하나이라, 온 우주에 충만하여 없는 곳이 없으므로 가까이 곧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먼저 알라"라는 법어가 탄생한다. 우주법계의 '보편 생명성', 이 생명에 대한 사무치는 실감(實感)을 느끼고, 그 경지에 젖어들 때 그것이 바른 생(生)이요, 삶이다. 이 근원의 생(生)에서 분출되는 생명흐름이 제대로 나에게로 흘러오지 않을 때 삶은 제 모습을 잃는다. 이 하나 생명의 흐름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소생(蘇生)이라 한다. 이 하나 생명은 시작과 끝이 없고, 고정된 모습이 없고, 쉼 없이 늘 재창조하여 간다. 따라서 이 하나 생명, 즉 마음하나의 경지는 본래 그 속에 뭇 내용을 싸잡고 있다. 온갖 현상이 거기에서 연유하며, 뭇 현상은 그것에 의해서 하나로 통일된다. 천만을 당적한다[당천만·當千萬]는 말씀은 그래서 있게 된다. '하나'이면서 '온 우주에 충만하여' 있는 것이다. 하나[일·一]이면서 우주에 충만한[다·多] 모습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법계의 본래 모습이다. 일(一)과 다(多), 전(全)과 분(分), 보편(普遍)과 특수(特殊)의 유기적 관계가 이 세계, 즉 우리들 삶의 모습이다. 이 깊은 내면의 소식이 "마음하나 천만을 당적한다"는 말씀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마음하나[심일·心一]라고 해서 그렇게 고정된 무엇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의 참모습[제법실상·諸法實相]을 이렇게 표현한 것뿐이다. 이 참모습은 무엇이라 불러서 고정시킬 수가 없고, 한정된 모습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무상(無相)이다. 무상이라고 해서 상이 없는 것이 아니다. 상은 있지만 고정시킬 수 없다[무상중유상·無相中有相]. 이 말은 쉴 새 없이 재창조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는 말이다. 실상(實相)은 늘 흘러간다. 진행형이다. 삶은 진행형이다. '생명의 흐름'은 진행형이다. "꽃잎은 피고 지지만 꽃은 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한다. 그래서 마음하나는 무상(無相)의 '생명흐름'으로서 뭇 현상을 나투면서 흘러가는 법계 실상을 가리킨다. 따라서 "마음 하나 천만을 당적한다"는 다분히 실상론(實相論)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반야중관적(般若中觀的)인 이미지를 갖는다. 이에 반해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는 말씀은 동적인 기분을 느낀다. 흰 바탕은 청정보리심, 백정보리심(白淨菩提心)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청정보리심의 심상(心象) 위에 비추어지는 뭇 현상을 상상할 수 있다. 따라서 '흰 바탕'은 중생의 마음, 보리심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희다'는 형용사는 '청정하다'는 말일 수도 있다. '청정보리심'의 경지는 무한의 의미를 가진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화엄경'의 보리심의 묘의(妙義), '보리심론'의 3종보리심 이야기다. '마음하나'인 실상의 세계는 나 밖에 있는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나 안에 있는 주객미분(主客未分)의 세계임을 자각하는 것이 '흰 바탕'의 말씀이 주는 암시이다.
대종사의 말씀은 철학적 용어를 피하고 있다. 깊은 철학적 내용을 쉬운 언어로 나타내는데 있다. 소박하고 투박한 표현으로 깊은 종교적 세계의 맛을 느끼게 하는 감칠미 나는 말씀이다. 말씀은 무뚝뚝하지만 내용은 다정다감하다. "마음하나…"의 말씀은 '대일경'(大日經)의 맛을 느끼게 한다. 우리들 생명체와 우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경이다. 그것은 마음이요, 보리심이다. 늘 깨어 있는 마음이다. 육안으로는 죽은 듯이 단단한 씨앗 속에 생명의 힘, 깨어 있는 힘, 살아 움직이는 힘이 있듯이, 겨우내 죽은 듯이 눈송이에 덮여 있는 꽃나무가지 속에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에너지가 있듯이, 천지만물 속에, 바로 '나' 속에도 찬란한 인생을 창출할 기운이 있다는 말씀이다.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너와 나, 주관과 객관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천지만물은 하나로 맺어 있고, 절대적인 분리체가 아니다. 이러한 느낌을 늘 다시 살아나게 할 때 그것이 자비심이요, 지혜의 활동이다. "하나 생명은 무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너는 너요, 나는 나다. 세상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있는 것 같고, 아름답고 추한 것이 있는 것 같다. 각양각색의 꽃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실감 있는 현실세계요, 리얼한 눈앞의 세계다.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는 말씀을 보라. 아름다운 조화의 세계를 볼 수 있지 않는가.

대종사는 "기적이 좋은 것이 아니라 마음 밝히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무엇이 기적인가. 자연 현상의 온갖 불가사의한 활동만이 기적이 아니다. 기적은 죽은 듯이 숨죽이고 있는 꽃나무 가지에서 봄만 오면 형형색색의 꽃을 피우는 사실이다. "천만의 속성을 품고 있는 보편한 마음(생명성)"을 내어 보이는 세계가 우리의 눈앞에 전개되는 뭇 현상이다.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는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금강정경'(金剛頂經)의 맛을 물씬 풍기는 말씀이다. 단청은 가장 조화로운 색감의 표현이다. 옳게 그려진 단청을 바라보면, 색감 이상의 심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마음을 밝히는 것', 그것은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는 말씀이다. 세계는 하나로 획일화된 기계가 아니다. 세상에 흰 꽃만 있다고 하자. 노랑꽃만 있는 세상이 있다고 하자.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다양한 꽃이 조화를 이룰 때 장엄하게 보인다. 꽃만 그렇겠는가. 온갖 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그러니 유일(唯一)의 발상은 인간의 무지에서 나온 발상이다. 그것은 자연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자연은 일여(一如), 여일(如一)의 세계다. 바탕으로 보면 하나[일·一] 같지만, 현상으로 보면 뭇 모습[다·多]이 있고, 밖으로 보면 가지가지 이지만[다·多], 안으로 보면 하나[일·一]에서 연유되어서, 이 하나[일·一]와 뭇[다·多]이 함께 활동하는 모습[일여·一如]이 우리의 세계다. '금강정경'은 우리의 마음, 아니 보편 생명성이 어떻게 제각기 제 모습을 나투면서 조화로운 세계를 나투어 가는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를 대종사는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고 그려내고 있다.

우리들이 늘 예참(禮懺)하는 삼십칠존(三十七尊)이 바로 그 경지이다. 마음을 밝히면 드러내어 보일 수 있는 인격적 경지이다. 마음을 밝힌다는 것은 마음을 일구어 내는(cultivate) 작업이다. 일구어 내는 작업에는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면이 있다. 소극적인 면에서는 잡초와 돌들을 제거하는 작업이요, 적극적인 면에서는 씨앗을 심어 결실을 얻는 작업이다. 청정보리심은 밭이요, 행위 업은 씨앗이다. 대종사는 가끔 "닦고 밝힌다"는 언어를 보인다. '닦는 것'은 소극적, '밝히는 것'은 적극적인 면이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닦는' 작업만 강조한다. 그러면 결실은 언제 얻을 것인가. 대종사의 뜻은 닦고 밝히는 경우를 동시에 설하지만, 적극적으로 '밝히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것이 밝게 사는 원리다.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는 밝게 사는 원리를 보여 준다. '금강정경'은 이 말씀의 바탕을 제공하여 준다. 가정은 하나이지만, 그 구성원인 가족은 제각기 개성을 가져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달라야 한다. 조직체는 하나이지만, 그 구성원은 다양한 소질을 가져야 한다. 사장과 사원은 무엇인가 달라야 한다. 발전적인 면에서는 아버지보다는 아들이, 사장보다는 사원이 더 나아야 한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아들, 사장과 사원을 분리하려 해서는 아니 된다. 하나의 가정이요, 회사이기 때문이다. 하나 가정의 생명이고, 하나 회사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가풍(家風)이 있고 사풍(社風)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 하나 생명의 다양한 활동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경정 정사 / 신덕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