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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眞覺)은 생활중각(生活中覺)이고 생활공각(生活共覺)이다

편집부   
입력 : 2013-08-05  | 수정 : 201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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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진언행자는 삼세(三世)를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바로 보는 염혜력으로서의 혜안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힘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기존 종교 신행은 피드백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피드백의 의미는 어떤 일을 하든지 우선 먼저 해본 다음에 그 결과를 재검토 해보고 하자되는 점을 교정한 후 다시 시도하여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현실에서 무엇인가를 해보고 시행착오를 겪은 다음에 대안을 통한 해결을 모색합니다. 하지만 신행의 측면에서는 늘 현실에서 뒤통수 먼저 맞고 나서 신행에서 정신 차린 다음에 일을 해결하는 방식, 즉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는 점에서 보완이 필요한 삶의 형태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진각종은 기존 신행의 차원을 뛰어넘어, 어떤 것을 해 보기 전에 미리 문제점을 파악하여 제거한 다음에 비로소 실제로 해 보는 개혁적인 삶을 제시합니다.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하여 법신부처님의 당체설법을 깨닫게 되어, 자기의 잘못을 참회하여 마음을 밝혀서 미연에 복 심고 미맹에 화 끊는 적극적 신행을 모색합니다. 뒤통수 맞기 전에 그 원인을 미리 파악하여 일이 저절로 해결되게 하는 심심미묘한 신행입니다.

염혜력은 법신부처님의 당체설법을 깨달아야지 증득할 수 있으며, 이 당체법문을 깨닫기 위한 가장 좋은 신행의 방편은 바로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함으로서 가능해 지는 겁니다. 당체법문은 우리로 하여금 변화를 촉구하는 진리의 목소리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목소리를 잘 들어도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는데 하물며 진리의 목소리인 당체법문을 듣는다면 얼마나 크게 유익한 일이 있겠습니까. 당체법문의 유익은 다름 아닌 듣고 깨쳐 참회하고 수순하면 변화될 수 있다는 원리의 체득입니다.

따라서 우리 진언행자는 현실을 분석한 다음에 정진하지 말고, 정진해 본 다음에 그로 인해 얻어진 지혜를 통해 현실을 분석해야 합니다. 현실의 일을 벌린 다음에 불공하지 말고, 불공해 본 다음에 현실의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육자진언수행을 통해 법신부처님의 당체법문을 증득하여, 나의 삶 속에서 실행함을 통해 구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육자진언수행의 수승함입니다.

회당대종사님께서는  말법시대 불교는 다라니로써 흥왕한다 라고 천명하셨습니다. 말법시대의 시대상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진리에 대한 그릇된 태도입니다. 우리 중생은 진리에 설득되어 수순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아집을 갖고 진리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진리의 목소리 즉 당체법문을 외면하고 심지어는 왜곡하여 자기합리화 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둘째, 타인에 대한 그릇된 태도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자비로서 애민해야 하는데 우리는 남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나와 남이 연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벌어집니다.

셋째, 물질에 대한 그릇된 태도입니다. 물질을 선용(善用)해야 하는데 오히려 숭상하는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회당대종사께서는 이러한 전도된 관계를 '마군' 또는 '외도'로 규정하셔서 "마군을 항복받고, 외도를 제어하여 구경성불 해야 한다"고 역설하셨습니다. 불공은 나와 진리, 나와 타인, 나와 물질과의 흐트러진 관계를 현실의 삶 속에서 여법하게 복원하려는 실천행을 말합니다.[生活中覺]

사람마다 갖가지 외면적 모습과 내면적 성품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다양한 모습에 등급을 매기는 것을 즐겨합니다. 모두가 일류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면에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일이 나의 강한 부분을 통해 이루어지기보다는, 의외로 나의 약한 부분으로 말미암아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서 공덕과 복덕을 증득하게 되는 점이 있습니다. 나의 강한 부분은 나로 하여금 상을 생기게 하고, 나의 약한 부분은 나로 하여금 하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심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불공할 마음의 자세를 갖추게 됩니다. 불공 안하는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오히려 교만해서 그러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서로의 화합 속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체를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상대방과 나를 포함하는 전체를 보아야 그 속에서 조화와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生活共覺]. 이런 원리를 깨쳤기에 진각성존께서는 혜안을 여는 마음 밝히는 공부, 이것이 곧 잘 살 수 있는 길이고 인격을 완성하는 길이고 나아가 진각의 길이라고 역설하신 것입니다.

수각 정사 / 능인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