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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마산 댁

편집부   
입력 : 2013-07-04  | 수정 : 2013-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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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택호는 마산 댁이다. 마산 바닷가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 내륙지방 시골에 시집와서 5남매를 낳아 기르며 억척스런 삶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교화의 임지에서 돌아본 어머니의 모습은 모든 법계를 보여주고, 들려주고, 느끼게 해주신 산 교육장과 같은 분이었던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은 따뜻한 봄이 오면 활짝 핀 꽃과 같이 환하게 미소지으며 꽃이 되어 즐거워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매년 삼악도의 괴로움을 겪는 것처럼 봄을 맞이하였다. 밥은 목에 넘어가지 않고, 입맛은 모래알 씹는 것과 같고, 소태같이 쓰고 거칠어서 도저히 음식을 먹을 수가 없을 정도로 봄을 많이 타셨다. 그렇지만 돈이 아까워 영양제는 엄두도 못내는 성격이었다. 그렇게 봄, 여름을 보내다 보니 몸은 야위어서 깡마르게 되고, 피부는 새까맣고, 눈은 움푹 패인 듯 들어가고, 신경은 고도로 날카로워 시한폭탄 같은 늘 불안한 분위기였다. 지옥고와 아귀고와 축생고의 삼악도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가을이 되어 서늘한 기운이 돌아오면 조금씩 식사도 하시고 기분이 한결 편안해 하시는 것이다.

동네 분들은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신다. "마산 댁은 마산어른의 성품이 늘 조용하시고 부드럽고 남을 위한 배려심이 많아서 참 좋겠어요." 그때마다 어머니는 흥분을 하시며 "같이 살아봐라 좋은가! 내 속 터지는 소리는 하늘이나 알고 땅이나 알지, 자고로 남자는 남자답게 엄하기도 하고 큰소리 칠 때는 치기도 해야지 답답할 때가 너무 많아. 내가 소원이라면 사위라도 눈빛 매섭고, 자기주장 강하고 엄중한 그런 사람을 맞이하고 싶어요." 훗날 큰사위를 얻게 되었다. 어머니 소원대로 제일 큰사위 성격은 냉정하고 날카로운 편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 마음은 편하지 못했다. 불만이 점점 쌓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또 둘째 사위는 좀 부드럽고 친화력이 좋은 다정다감한 사위를 얻는 게 소원이었다. 원력 따라 소원이 성취되었다. 하지만 만족감이 멀리 가진 못했다. 그 다음 막내 사위는 어질고 말수가 적고 선비 같은 사위를 얻고 싶어했다. 또 소원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불만은 또 시작되었다. 답답하고 속 터진다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 어머니의 만족이란 어느 곳에 있는 것일까? 어떠한 시간과 공간 속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애착을 갖고 있던 둘째 아들을 36세에 교통사고로 먼저 떠나보내고 눈물과 한숨으로 "지옥의 고통이 이보다 더 괴로울까?"라고 하시며 괴로워 하셨다. 배는 고픈데 먹을 수가 없으니 아귀의 세계를 살았고, 인과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축생의 세계를, 맏아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항상 시비 갈등 속에서 다투는 수라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상처투성이 우리 어머니의 삶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늘 무거운 납덩이가 되어 끊임없이 짓눌려 있었다.

'부모에게 믿음이 있게 함은 참된 효니라'라는 '진각교전'의 말씀은 진정으로 나를 해탈시키는 가르침이었다. 우리 엄마 마산 댁은 환갑이 넘은 연세에 불법에 제도되어 심인당과 인연이 되었다. 잠시 동안의 참회와 기쁨이 인간세계와 천상세계를 느껴보는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교화스승인 두 딸을 위하여 도우미를 자청하셨다. 새로운 교화 임지에 이동할 때마다 왕래를 하며 법당청소를 비롯해서 주변환경을 깨끗이 하시며 인연 지어온 심인당이 8개였다. 성스러운 부처님 말씀을 항상 듣고 사시는 성문의 세계, 자신의 인과를 깨닫는 연각의 세계, 늘 염송하시고 참회로서 마음 다스리는 보살의 세계, 모든 것에 감사와 고마움, 은혜를 느끼는 부처님의 세계를 사셨던 것이다. 따뜻한 봄날 77세로 열반하셨지만 참으로 편안한 모습이셨다. 고인의 뜻대로 화장한 유골은 벚꽃이 만발한 산길을 따라 마산 무학산 경치 좋은 곳에서 꽃이 되어 훨훨 날아오르셨다.

심원지 전수 홍원심인당 교화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