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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것은…

편집부   
입력 : 2013-06-14  | 수정 : 201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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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겨루지 않고 뭇 사람이 꺼려하는 것에 처한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물은 그러하지요. 용솟음치고 휘돌아나갈 때, 스스로 낮추고 느려질 때를 분명히 알고 조절합니다. 그래서 노자는 물의 덕을 도에 가깝다고 역설했나봅니다. 그러므로 물처럼 살기를 지향하면서 살아간다면 삶의 수고로움을 조금은 수월하게 견뎌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떠올렸던 것은 설악의 계곡들을 보고 난 후였습니다. 처음 출발 의도는 봉정암 진신사리탑 참배였습니다. 봉정암은 널리 알려진대로 5대 적멸보궁 중의 한 곳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입니다. 창건된 연대가 신라 선덕여왕 시대라 하니 그 고색창연한 세월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봉정암으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백담사에서 출발해서 설악의 수렴동계곡을 거쳐 오르는 길이 일반적인 듯합니다. 내설악은 그곳이 왜 내설악인지를 증명하듯이 산길은 오밀조밀했고 계곡은 투영한 물빛을 보여주었지요. 산행을 하는 내내 봉정암으로 향하는 인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위해 가는 분들은 약속이나 한 듯 배낭에 미역꾸러미를 매달고 가시더군요. 아마도 배낭 안에는 쌀이며 떡이며 공양물이 담겨져 있었겠지요. 그냥 오르기도 쉽지 않은 길을 그 무거운 공양물을 지고서 오르다니 그들의 간구가 눈에 보이는 듯 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저는 마음 가볍게 산행을 즐겼지요. 놀면서 쉬면서 간간이 부은 발을 시린 계곡물에 담궈 가면서. 두어 달 전 직장을 옮긴 후 한동안 산행을 끊었던 참이었으니까요. 그 시간이 저를 얼마나 지치게 했는지 새삼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를 뼈저리게 느끼곤 했습니다. 그런 날들 중에 주어진 산행의 기회였으니 얼마나 기꺼운 일이었는지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막상 지친 것은 봉정암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내려놓았을 때였어요. 내설악 깊은 산 속에 있는 자그마한 암자로 상상하고 갔던 봉정암은 그야말로 거대한 기도도량이었습니다. 하루에 보통 천여 명 정도를 수용한다고 하니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이 어찌 물 흐르는 것처럼 수월할 수 있겠습니까.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저항하면서 그 밤을 하얗게 지새웠습니다.

이튿날 하산코스로 정한 외설악 천불동계곡은 그야말로 웅장하면서도 서릿발같은 위엄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베토벤 교향곡을 듣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특히 '운명'이라는 부제가 붙은 제5번 4악장 알레그로 부분을 듣다보면 힘이 힘을 부르고 속력이 속력을 불러일으키는 엄청난 가속도가 느껴지지요. 피날레 부분으로 갈수록 음폭이 커지면서 거칠게 내려긋는 현악기군과 광막한 금관악기군의 음색이 당장이라도 충돌할 듯이 팽팽하게 부딪히지만 장중한 팀파니와 새소리를 닮은 피콜로의 중재로 막을 내립니다. 천불동계곡의 느낌이 꼭 그렇더군요. 물들이 얼마나 다부지게 용솟음치고 휘돌아나가는지 '운명' 교향곡을 백 번쯤 듣고 난 후의 기분이었습니다.

잠시 이성복 시인의 싯귀를 빌어봅니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미치게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전속력 전방위적으로 아름다운 것.' 산행을 끝내고 나니 남는 감정이 꼭 그랬습니다. 지독한 몰입에서 빠져나온 후의 허탈감이 전신을 뒤덮으면서 그때 비로소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이지요.

김혜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