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9

편집부   
입력 : 2013-06-03  | 수정 : 201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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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밀수행으로 육행을 만족한다


(해설)육자진언과 육행

'옴'은 단시(檀施) '마'는 지계(持戒) '니'는 인욕(忍辱) '반'은 정진(精進) '메'는 선정(禪定) '훔'은 지혜(智慧). 이 육행(六行)을 관행(觀行)하면 생로병사 받지 않고 잊지 말고 외우면 천재(天災) 만액(萬厄) 소멸된다.(실행론 제1편 제3장 제2절)

본 말씀은 육행에 배대된 육자진언의 관행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육자진언을 육바라밀에 배대한 것은 '마니칸붐'에서 처음으로 보이고 있다. '마니칸붐'에서는 육자진언을 육바라밀에 배대하여 수지독송과 실천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서 '육행'이란 육바라밀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문의 '육행을 관행하면'이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육바라밀을 관행하면'이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본 말씀의 앞뒤 문맥에서 보면 단순히 육바라밀을 관행한다는 의미는 좁은 해석임을 알 수 있다. 앞의 문장에서 육행을 육자진언에 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육행을 관행한다는 것은 곧 육행에 배대된 육자진언을 관행한다는 의미이다. 육행에 배대된 육자진언을 관행한다는 것은 육행에 배대된 육자진언의 내관을 통하여 육행이 실행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육자진언에 육행이 배대됨으로써 육자진언은 육행의 종자와 같게 된다. 이와 같이 육행에 배대된 육자진언을 관하는 과정에서 육행의 의미는 체증되며, 육자선정을 통해 육행은 생활 중에 실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시 육행에 배대된 육자진언과 함께 삼밀수행을 행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심인전당에서 행하고 있는 유상삼밀(有相三密)을 넘어 무상삼밀(無相三密)로 나아가 생활 중에 육행이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것이나 단순한 관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법에 이은 행법이 강조되고 있다. 이제 본 말씀을 최종적으로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육행에 배대된 육자진언을 삼밀수행으로 육자선정에 들었을 때에 생로병사는 받지 않으며 천재만액은 소멸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삼밀수행으로 육자선정에 들었을 때에 육행이 만족하게 됨으로써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애착과 집착, 고통과 괴로움, 윤회의 굴레 등에서 벗어나게 되고 천재만액은 소멸하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삼밀수행은 어떻게 육행의 만족으로 나아가는가? 그것은 삼밀 즉 신밀, 구밀, 의밀은 곧 육행인 단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바라밀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삼업이 아닌 삼밀은 곧 육행실천의 완성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대일경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진언행자가 신밀문, 어밀문, 심밀문, 이 세 가지 방편으로 스스로 삼업을 청정하게 할 때에 곧 여래의 삼밀에 가지되며, 나아가 현재의 생애에서 지바라밀(地波羅蜜)을 만족하게 된다. 또한 [번뇌를] 다스리는 행을 갖추어 닦음으로써 다시는 수많은 겁을 [윤회 가운데에서] 지내지 않게 될 것이다." 본 문장에서 지바라밀은 10바라밀을 가리킨다. 결국 진언행자가 삼밀수행으로 여래의 삼밀에 가지되었을 때에 10바라밀을 만족하게 되며, 생로병사의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을 나무에 비유하면 한 뿌리에 두 가지가 나고 두 가지에서 여러 가지가 나니 흩어진 가지에 집착하면 고통이 된다. 그 뿌리가 본심이니 본심진언은 육바라밀의 암호와 같다. 이것으로써 망심(妄心)을 벗기면 본심이 드러난다. 마음도 나무와 같아 뿌리는 하나이며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나 가지가 많으면 망심과 같아서 뿌리를 덮는다. 육자대명왕진언을 외우면 망심이 없어지고 뿌리인 자성부처[本來相]가 드러나 지혜가 나고 넉넉해진다. 보이지 않는 법신은 진언을 듣고 있으니 잊지 말고 계속하여 염송하면 자연히 희사(喜捨) 정계(淨戒) 하심(下心) 용맹(勇猛) 지혜(智慧)를 행하게 된다.(실행론 제1편 제3장 제6절 가) 

본 말씀은 육자진언을 염송하면 망심이 사라지고 본심인 자성부처가 드러남을 설하고 있다. 그것은 육자진언이 육바라밀의 암호와 같아서, 육자진언을 통한 삼밀수행이 곧 육바라밀 수행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육자진언을 염송하면 본심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육자진언이 본심진언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나무에 비유하면 나무의 뿌리는 본심에 해당하고, 나무의 가지들은 망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나무의 가지에 집착한 나머지 나무의 뿌리를 알지 못하면 나무는 병들게 된다. 이와 같이 표면상에 나타나는 망심에 집착하여 마음의 본심을 알지 못하면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망심을 놓아 버리고 본심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언이 육자대명왕진언 옴마니반메훔이다. 왜냐하면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은 중생들의 본심은 물론 보살과 모든 부처의 본심을 드러내는 진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당대종사께서는 육자진언은 모든 부처와 보살과 중생들의 본심이라고 하였다.

또한 육자진언은 육바라밀의 암호와 같아서, 육자진언을 통한 삼밀수행은 육바라밀 수행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본심을 드러내는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덕목이 육바라밀 수행이다. 육바라밀은 여섯 가지의 완성을 의미한다. 여섯 가지의 완성이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완성이다. 대승불교를 실천하는 보살은 이 여섯 가지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첫째, 보시(布施)란 내 것을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으로, 법이나 재화 등을 베풀어주거나 두려움 등을 없애 주는 것이다. 둘째, 지계(持戒)는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 옳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인욕(忍辱)은 인내하는 것으로, 남이 나를 모욕하거나, 또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성내지 않고 참는 것이다. 넷째, 정진(精進)은 노력이라는 뜻으로,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한 것이다. 다섯째, 선정(禪定)은 마음을 고요히 하여 하나로 집중하는 것이다. 여섯째, 지혜(智慧)는 모든 것은 본체가 비어 있음 즉 공(空)함을 깨닫는 것이다. 특히 나의 본심은 원래 비어 있어 맑고 깨끗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의 덕목을 완성의 단계로 끌어올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되도록 하는 것이 곧 육바라밀의 실천이다.

회당대종사께서는 육바라밀의 실천수행을 육행실천이라 하면서, 덕목의 이름을 달리 하고 있다. 즉 보시는 희사로, 지계는 정계로, 인욕은 하심으로, 정진은 용맹으로, 선정은 염송으로 하였으며, 지혜는 그대로 두었다. 이는 육바라밀의 의미를 더욱 더 다가오게 하려는 대종사의 배려라고 생각된다. 희사(喜捨)는 기쁘게 버린다는 의미로, 탐욕스런 마음과 인색한 마음은 버리고 베푸는 마음은 기른다는 것이다. 정계(淨戒)는 맑은 계율이라는 의미로, 옳지 않는 것은 하지 않지만 바르고 옳은 것은 행한다는 것이다. 하심(下心)은 마음을 낮추는 것으로, 바르고 옳은 것을 행할 적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성내지 않고 참으며 나아가 바르고 옳은 것을 행하는 것에 상(相)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용맹(勇猛)은 용맹스럽게 정진한다는 의미로, 바르고 옳은 것에 대해 게으르지 않고 물러남이 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염송(念誦)은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을 통한 삼밀수행으로 육자선정에 드는 것을 의미하며, 육자선정을 통하여 본심을 밝힌다는 것이다. 지혜(智慧)는 육자진언 염송으로 육자선정에 들었을 때, 그 본심에 나타나는 염혜력을 말한다. 이러한 육행실천은 몸과 입과 뜻을 통하여 행하는 삼밀수행과 다르지 않다. 진언행자가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 염송을 통한 삼밀수행으로 육자선정에 들어 본심을 밝히게 되면, 나머지 다섯 가지 행은 그 본심에서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회당대종사께서는 육행을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에 각각 배대하고 있으며, 또한 희사하고 염송한다고 하는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행론심화연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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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도원 정사


(콩트)염송소리를 좇아서…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49일불공을 하는 쌍둥이 형제가 나란히 앉아 오전불사를 마치고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염송을 더 했다. 쌍둥이 형제의 염송소리는 이미 심인당에서 신교도들에게 정평이 나 있었다. 그들은 항상 소리를 내서 하는 항마염송을 했다. 그 소리는 두 사람이 내는데도 하나인 듯 조화로웠으며, 나직한 듯 하면서도 강약이 뚜렷하고 분명했다.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완벽한 화음이었다. 댓잎을 흔들며 지나가는 명지바람 소리가 그렇듯, 솔잎을 희롱하는 건들마가 그렇듯 쌍둥이 형제의 염송소리는 그야말로 명품이라 해야 맞춤한 말일 것이다.

"어떻게 오셨는지……."

깨침이 정사가 심인당 문을 열고 밖으로 막 나설 때 중년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문 앞에서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지나가던 길인데 절인 듯 해서 들어와 봤습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하도 신기해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랬습니까. 잘 오셨습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저하고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차실로 가시죠."

"……."

"차를 한 잔 드세요. 연잎차입니다."

중년의 남자는 깨침이 정사가 우려내 놓은 찻잔을 받아놓고 차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선뜻 차를 입으로 가져가지도 않고 여기저기를 한참 둘러보다가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는 찻잔을 다탁 위에 내려놓았다.

"여기는 어떤 곳입니까? 절하고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네. 심인당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심인'을 찾는 곳이라는 말이지요. '심인'은 우리 누구나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본심' 곧 '진실한 참회에서 밝혀지는 참마음'을 말합니다. 심인당은 이를 찾는 곳이지요."

"여기도 그럼 불교입니까?"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마음을 닦고 진리를 깨닫는 수행도량이기에 심인당이라고 하고, 이 '심인'을 깨달은 경지를 '진각'이라고 이름해서 종단을 진각종이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인당에서는 예불을 본다고 해야하나요? 기도라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교주 청정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본존이자 본심진언인 '옴마니반메훔' 이 여섯 글자를 염송하면서 생활하는 가운데 가졌던 탐욕스런 마음과 인색한 마음은 버리고, 베푸는 마음은 기른다는 의미로 희사라는 것을 합니다."

"그렇다면 공양물을 올린다거나 하는 것은 어디에 하는지요?"

"진각종처럼 밀교의 불공은 상호공양입니다. 중생도 공양하고, 부처님도 중생들을 위해 공양하는 이치입니다. 만다라세계가 형성되는 과정과 구조를 말씀드려야 하나, 이 자리에서는 좀더 쉽게 이야기해서 일상생활 자체를 불공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진각종을 창종하신 회당대종사께서는 '일상생활 그 자체가 곧 불공'이라고 하시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공에서의 공양은 물건을 주고받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 마음과 마음으로 하는 일체의 것을 말합니다."

중년의 남자는 이 대목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어찌 보면 잘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 같기도 했다. 깨침이 정사는 모처럼 교화대상자를 만난 것처럼 신이 났다. 그러잖아도 점심공양을 하고는 '마음공부를 안내하는 곳'이라고 써서 붙여놓은 천막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만날 예정이었다. '마음공부를 안내하는 곳'은 심인당 입구에 만들어 놓은 천막찻집이다.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이라 차를 공양하며 심인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제대로 물을 만났으니 점심을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을 몰랐다. 그때 중년의 남자가 깨침이 정사의 눈치를 살피며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더 나누시지요. 요기할 수 있는 것을 간단하게 좀 내오라고 하겠습니다."

"아니. 그래도 되는지……."

"괜찮습니다. 저기 저 문 앞 천막 있는 데로 가시지요."

중년의 남자는 깨침이 정사를 따라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깨침이 정사는 '마음공부를 안내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본격적인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진각종에서 하는 불공은 희사와 염송이 주인데, 육자대명왕진언 '옴마니반메훔'을 부르고 마음 속으로 관하면서 옳지 않는 것은 하지 않지만 바르고 옳은 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행한다는, 맑은 계율이라는 의미의 정계정신을 갖게 하고, 바르고 옳은 것을 행할 때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성내지 않고 참으며 상을 내지 않는다는, 마음을 낮추는 의미의 하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또 용맹스럽게 정진한다는 의미로, 바르고 옳은 것에 대해 게으르지 않고 물러남이 없이 나아가는 용맹심과 육자진언 염송으로 선정에 들었을 때, 그 본심에 나타나는 염혜력, 즉 지혜를 기를 수 있도록 합니다. '옴마니반메훔' 여섯 글자 하나 하나에는 희사, 정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라는 이 여섯 가지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어 진언을 염송하면 여섯 가지의 특별한 힘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중년의 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찻잔을 들고 입가에 웃음기를 띄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차의 향과 맛을 음미하기라도 하는 양 입 속에 머금고 한참을 있는 듯도 했다.

"각자님?"

"……."

깨침이 정사는 신이 나서 열변을 토하듯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새 각자님, 하는 말을 내 뱉고는 스스로도 놀라 멈칫했다.

"아. 각자님이라는 표현은 진각종에서 남자 신교도분들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깨달은 사람, 곧 부처라는 표현이지요. 그만큼 진각종에서는 누구나 본래 부처이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인식 하에서 수행해 가는 것이거든요. 심인당에 찾아오신 선생님이 너무 적극적이고 분명한 생각을 가지신 것 같아 오랫동안 심인당에 나오신 분처럼 느껴져서 그랬던 것입니다. 전혀 놀라실 일이 아닙니다. 선생님도 이미 부처님이십니다."

중년의 남자는 만면의 웃음을 띄우면서도 겸연쩍어 했다. 깨치미 정사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진각종에서는 육행실천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심공'이라는 마음공부와 더불어 앞에서 말한 육행을 실천행으로 옮겨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고 활용돼야 한다는 까닭에섭니다. 그래서 실천불교라 하고, 생활불교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밀교정신이고 밀교행입니다. 뜻으로만, 말로만 하는 기복불교가 아니라 마음으로, 실천으로 행하는 불교입니다. 어떻습니까? 앞으로 종종 심인당에 나오셔서 불공을 한번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다음 일요일에 꼭 뵙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깨침이 정사의 쐐기를 박는 말에 중년의 남자는 그렇게 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찻잔을 들어올렸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