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8

편집부   
입력 : 2013-05-01  | 수정 : 2013-05-01
+ -

(해설)법신 비로자나불의 설법


육자진언 염송(念誦)하면 비로자나부처님이
항상 비밀한 가운데 모든 법을 설하여서
무량하고 미묘(微妙)한 뜻 자증(自證)하게 함이니라.(실행론제1편 제3장 제1절)

본 말씀은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하면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설법을 자증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말씀은 세 가지 점에서 성찰해 볼 수 있다. 먼저는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이 항상 설법하고 계시다는 점이다. 다음은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서, 알아차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방편들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미묘한 뜻을 어떻게 현증하는가? 등에 대한 것이다.

먼저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법을 설하고 계시다는 점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법신 비로자나불은 진리 그 자체이며 영원의 이법(理法)으로서의 불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진각성존 회당대종사께서는 문답을 통하여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은 사람도 아니요 신(神)도 아니요 이치(理致)로 계시는 부처님이시라. 이런고로 이불(理佛)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이 이치로 계시는 이불이라고 한다면, 이불은 시간적, 공간적인 제약을 모두 넘어선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에서 회당대종사는 '실행론' 제2편 교리 제1장 제1절 (가)에서 비로자나부처님은 시방삼세에 하나라고 하여 시간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였으며, 온 우주에 충만하여 없는 곳이 없다고 하여 공간적으로 제약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넘어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이치로 계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지금, 현재, 사실 속에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이 항상 함께 머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 현재, 사실 속에는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이 드러내고자 하는 법이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지의의 '금강명경문구'에서는 그것을 즉사이진(卽事而眞), 즉 사실이 곧 진실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다. "비로자나부처님은 모든 곳에 두루하여 있으므로 일체의 모든 법이 모두 불법이다. 모두가 불법이기 때문에 곧 모두가 법성(法性)이다. 부처님은 모두 그것을 즐기기 때문에 말이 무량하다. 달리 다른 법이 없으므로 깊고 깊은 법이라 한다. 사실이 곧 진실이며 참된 모습이 아닌 것이 없으며, 한 물건 한 향기가 중도(中道) 아님이 없다." 사실이 곧 진실이며, 참된 모습이 아닌 것이 없으며, 한 물건 한 향기가 중도(中道) 아님이 없다 할지라도 탐진치 삼독에 가려져 있는 중생들에게는 결코 사실이 사실로 나타나지 않는다. 일행은 '대일경소'에서 신변가지(神變加持)를 설명하며 대일여래께서 중생들의 이러한 모습을 안타깝게 여겨 대비원을 세우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대일여래는 스스로 본불생(本不生)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중생들을 이롭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자재신력가지삼매에 머물러 일체중생들을 위해, 중생들의 갖가지 성품에 따라 알맞은 법을 설하며 갖가지 마음작용에 따라 관조문(觀照門)을 열겠다고 서원한다. 이러한 응화(應化)는 언제, 어디서에나 일어나는 시작도 사라지는, 끝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비유하면 마술사가 주술의 힘으로 약초를 가지하여 갖가지의 일을 보이지만, 만약에 가지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여래의 금강환술도 이와 같아서 연이 다하면 사라지고 계기가 있으면 곧 생기지만 일마다 참되며 그 일은 끝이 없다. 그러므로 신력가지경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이 자재신력가지삼매에서 언제, 어디서나 법을 설하고 있으며, 탐진치에 가려 있는 중생들은 법신 비로자나불의 가지력에 의해서 부처님의 법을 들을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회당대종사께서도 '실행론'에서 법신불의 설법에 대해 설하고 있다. 곧 비로자나부처님은 당체로써 나타나니 모든 사실 설법이요, 활동하는 경전이라 하였다. 이를 체상용으로 설명하자면 법신불의 체(體)는 육대(六大)로, 상(相)은 사만(四曼)으로, 용(用)은 삼밀(三密)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자면 법신 비로자나불은 땅과 물과 불과 바람과 허공과 심식을 체로 하여 생명이 있는 유정들로 나타나며, 생명이 없는 일체의 사물들로 나타나며, 일체의 말과 소리 명칭 성명 그림 문자 등으로 나타나며, 유정 비정들과 일체 유형 무형들의 변천동작으로 나타난다. 또한 신밀 어밀 의밀의 삼밀로써 부처님의 사업을 완성하신다. 법신 부처님은 이와 같이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광명을 놓아 법을 설하고 있지만, 탐진치의 번뇌로 덮여 있는 중생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법신불의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가?

회당대종사께서는 법신불의 생멸없는 그 진리는 인과로서 나타나므로 4지 4력활동으로 생활 가운데 깨달으면 된다고 하셨다. 4지는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를 가리키며, 4력은 복지전수(福智專修), 사리필구(事理必究), 생활취사(生活取捨), 결과내증(結果內證)하는 힘을 가리킨다. 이러한 4지 4력은 중생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성품이기는 하나, 중생들은 탐진치에 가려 제대로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앞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대일여래의 가지를 입어야 한다. 대일여래의 가지를 입는 방법은 대일여래의 삼밀과 상응함으로써 가능하여진다. 그러므로 본 말씀 가운데에서도 '육자진언 염송하면'이라고 말씀하셨다. 본 말씀 가운데 '육자진언 염송하면' 이라는 것은 '육자진언과 함께 삼밀수행하여 육자선정에 들면'이라는 뜻이다. 진언행자는 몸으로는 대일여래의 밀인인 금강지권인을 하고, 입으로는 그의 진언인 육자대명왕진언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하고, 뜻으로는 그의 묘관인 육자관을 행하여 스스로 삼업을 청정하게 할 때 행자의 삼밀과 여래의 삼밀이 평등하게 된다. 이때에 여래의 삼밀에 가지하게 되며, 행자는 여래의 삼밀에 가지된 가지수용신(加持受用身)을 보게 된다. 가지수용신은 바로 비로자나의 일체에 두루한 몸이다. 일체에 두루한 몸이란 곧 진언행자의 평등한 지신(智身)인 것이다. 곧 4지와 4력을 갖춘 몸이 된다는 의미이다.

진언행자가 4지 4력을 갖추게 되면 시방삼세에 나타나는 일체 모든 사실들과 내가 체험하고 있는 좋고 나쁜 모든 일이 법신불의 당체로서 활동하는 설법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므로 체험이 곧 법문이며 사실이 곧 경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법문과 경전을 어떻게 현증하는가?

회당대종사께서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밀은 색을 이(理)로 하여 일체 세간 현상대로 불의 법과 일치하게 체득함이 교리이다." 비로자나부처님의 가르침은 나타난 현상들을 이치로 하여 법을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간의 현상 그대로 부처님의 법과 일치하게 체득하라는 말씀이다. 부처님 법과 일치하게 체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부처님께서 하신 진리의 말씀과 같이 체득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듣고 배운 많은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 어느 말씀으로 체득하라는 것인가? 먼저는 앞에서 회당대종사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법신불의 생멸없는 그 진리는 인과로서 나타난다"고 하였으므로, 우선 인과의 이치로써 체득해가야 할 것이다. 인과의 이치는 곧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법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5온이 모두 공(空)하다는 이치로써 체득해야 한다. 5온이 공하다는 이치는 불사 중에 항상 암송하고 있는 실천참회의 무아(無我)의 이치와 다르지 않다. 중생이 전도되어 맞닥뜨리는 현상은 무아의 이치에 어두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간다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이치, 심즉불(心卽佛)의 이치, 법계법신과 자성법신이 하나인 이치로써 체득해야 할 것이다. 회당대종사께서는 '실행론'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고서 첫째는 일체유심조를 깨닫는 것이고, 둘째는 심즉불을 깨닫는 것이고, 셋째는 법계법신과 자성법신이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언행자는 육자진언을 통한 삼밀수행으로 육자선정에 들었을 때에 법신부처님의 가지력을 입게 된다. 부처님의 가지에 의해 중생의 삼밀과 여래의 삼밀은 서로 상응하여 평등하게 되며, 여래의 삼밀과 중생의 삼밀이 평등하게 되었을 때에 행자는 법신 부처님의 설법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법신부처님의 설법은 곧 인과의 이치, 무아의 이치, 일체유심조의 이치, 심즉불의 이치, 법계법신과 자성법신이 하나인 이치로써 체득하고 현증하여야 한다.

실행론심화연구모임


b8sil.jpg
그림=도원정사


(콩트)라일락 꽃향기에 첫사랑 그녀가…


진이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끝내고 막 정송을 시작했을 때 그가 방으로 들어섰다.

"아침산책 가지 않을래?"

"……."

그가 아침산책을 가자고 한 말에 진이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이 간질거리면서 속만 타들어 갔다. 시간을 정해 놓고 염송을 할 때는 말을 해서 안 되며, 결인을 깨서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염송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에게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아차, 싶었다.

하루 밤이라도 묵어 가는 여행 중에 염송하는 것을 모르는 이들과 어울리다보면 조금은 번거로운 일들이 종종 있었던 터라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말을 할 입장이 안 되다 보니 순간적으로 오해 아닌 오해를 한다손 치더라도 염송을 마치고 차근차근 설명을 해준 뒤에는 대부분 이해를 해주었다. 간혹 불편한 상황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을 때거나, 염송을 시작한 지가 그리 오래지 않았을 때는 결인을 떼고 말을 하는 편이 나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그가 오해를 할 인물이 아닌 것을 알기에 염송을 깨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염송이 뭔지, 왜 하는지,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웬만큼은 알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아침산책을 가지 않겠다는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진이가 심인당에 다니는 것을 아는 오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가 조금은 계면쩍어 하며 되돌아서서 닫았던 문을 다시 열어제치자 라일락 꽃향기가 훅 끼쳐왔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진이의 방 앞에 있었던 라일락은 꽃을 피우는 아침마다 진한 향기를 방으로 배달해주었다. 방문을 열 때마다 방안으로 배달되는 라일락 꽃향기는 단순한 향기가 아니라 첫사랑을 만나는 기쁨이었고, 첫사랑 그녀와 마주앉아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의 화제이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만난 라일락 꽃향기는 만날 수 없어 애태우던 첫사랑의 환영을 한꺼번에 불러일으켰다. 진이는 저도 모르게 첫사랑 그녀에게로 향하던 걷잡을 수 없는 이끌림에서 화들짝 깨어나 염송에 집중하기로 했다. 염송을 마치자마자 라일락 꽃향기 밑으로 달려가 보리라는 생각만큼은 기억의 저장창고에 고이 넣어 두고서 결인하고 가부좌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침부터 뭘 그리 열심히 하나? 말조차 않고……."

염송을 마치고 라일락 꽃향기를 찾아 급한 마음으로 방문을 열어제쳤을 때 밖에서 서성이던 그가 말을 걸었다.

"아∼ 그거, 염송한거야. 어제 저녁에 미리 말을 해주지 않아서 미안했네. 진언염송을 할 때는 말을 해서 안 되거든. 좌우지간 미안하다."

"진언염송이라……. 그렇구나."

"라일락 꽃향기가 너무 좋더라."

진이가 라일락 꽃향기의 진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자 방 앞 오른쪽 모서리 담장 옆에 있던 라일락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곳으로 다가가자 방안으로 찾아들었던 것보다 더 진한 꽃향기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다시 첫사랑 그녀가 스멀스멀 기억 속에서 풀려 나와 전신을 휘감아 오르는 기분이었다. 진이는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너. 그 사람 생각하지? 첫사랑 말이다."

"무슨 소리야? 아니야."

"내 눈은 못 속여. 너 라일락꽃만 보면 그랬잖아. 여전하구나."

"그게 아니고……. 염송이라는 것은 첫사랑을 생각하는 그 마음처럼 순수하고 간절하며 두근거리는 것이거든."

"딴전 피우지마. 보고 싶다면 그냥 보고 싶다고 해. 그런데 염송은 왜 하는 건데?"

"순수해지려는 것이지. 네 말처럼 첫사랑을 찾는 그 마음으로……. 농담이고, 그건 말이야 때묻은 마음을 잘 닦아서 본래 마음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까. 거울을 잘 닦아 놓으면 거울에 비춰보는 사물이 보다 잘 보이듯이, 마음도 번잡스럽지 않게 가지런히 하고 처음처럼 그 순수한 마음을 갖게 되면 때묻지 않은 본심을 찾게 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지. 그러면 부처님과 같은 마음이 되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알아듣겠는가?"

"부처님의 마음이 되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허 그거 참. 스님이 설법을 한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부처님이 설법을 한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물론 살아 계실 때는 설법을 했다고 하지만……."

"네가 방금 말하는 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만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너도 부처가 될 수 있고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듯이 수많은 부처님이 있을 수 있고 또 있는 거라네. 그런데 너 같이 갇힌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오직 한 부처님만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지. 생로병사를 겪은, 화신이라고 하는 석가모니부처님 외에 보신 부처님도 있고, 법신 부처님도 있지.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은 사람도 아니요, 신(神)도 아니요, 이치(理致)로 계시는 부처님이지. 달리 말해서 진리 그 자체라고도 하지. 불교의 개념은 이처럼 넓고 크고 둥글고 차다네. 그래서 이 부처님은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항상 설법을 하고 계신다 이거지. 단지 어리석거나 깊은 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그렇다면 염송을 하면 그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염송을 한다는 것은 부처님과 같아지려는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입으로는 부처님의 소리인 진언을 부르고, 몸으로는 부처님의 행이라 할 수 있는 지권을 하고, 뜻으로는 부처님의 생각이라 할 수 있는 관법을 말하는데 쉽게 말해 마음을 일으키는 작용이지. 그래서 염송을 하는 사람이 부처님과 같이 말하고 행동하고 사고하면 통할 수 있다는 말이야. 그 때 비로소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게 된다는 말이지."

진이의 장황스러운 말이 이어지는 동안 그는 한때 반짝거렸던 눈을 지그시 내리 감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재미없는가? 쉬 배울 수 없는 공부야. 잘 들어둬."

"알 듯도 하면서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친구의 정으로 안타까운 인생을 위해 다시 한 마디로 쉽게 말해줄게. 네가 말단 직원이었을 때는 높으신 사장의 마음을 잘 못 헤아려. 그렇지? 사장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거나 행동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

"그건 그렇지."

"똑 같은 이치지. 네가 부처님이라면 매사에 어떻게 행동하겠어? 부처님처럼 행동할 것 아니냔 말이다. 부처님이 돼봐야 부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있겠지? 염송을 한다는 것은 바로 부처님처럼 되고자 하는 행위라 했지. 이제 좀 알아듣겠는가?"

"그러네."

"염송을 하면서 부처님을 닮아 가고, 그래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게 된다는 말이지.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받아들이고, 주관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네. 삿된 마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 진리는 인연과(因緣果)의 이치에 맞게 작용하는 법이거든. 그래서 인연을 잘 지어라, 마음을 비우라는 말도 하는 것이지. 알겠는가? 마음을 비우지 않고 욕심으로 꽉 차 있으면 누구나 주어진 상황을 아전인수격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라네. 순수하게 보지 못하고 살피지 못한다는 말이지. 상대방은 마음을 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데 혼자서 멋대로 상상하는 짝사랑 마냥……."

오랜 친구인 그가 살고 있는 시골집에서의 둘째 날 아침시간은 라일락 꽃향기 속에 묻혀 또 다른 추억으로 물러서고 있었다. 찾아질 듯 하면서도 좀체 찾아지지 않는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처럼…….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