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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청앵을 생각하며

편집부   
입력 : 2013-04-30  | 수정 : 201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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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봄빛이 난만하다. 눈 닿는 곳마다 봄꽃들이 흐드러지고 가로수들도 이제 제법 튼실한 연초록 잎을 매달고 있다. 기실 봄이 우리 곁에 온 것은 한참 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봄이 왔음을 감각할 수 없었다. 우리의 대지에는 차가운 바람만이 머물고 있었고 태양의 온기는 여전히 미온이었다. 몸도 마음도 봄을 맞이하기엔 너무 지쳐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맞닥뜨린 꽃소식이라니 반가운 마음에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선다. 슬렁슬렁 걷다가 꽃이 흐드러진 벚나무 곁을 지나칠 때였다. 어디선가 청아한 새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나무 우듬지 쪽에 박새 한 마리가 앉아서 새초롬히 나를 쳐다본다. 박새란 놈은 내 시선을 느꼈을 법한데 다른 데로 날아가지 않고 계속 지저귄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지면서 그림 한 점이 떠오른다.

보슬비가 보얗게 번지는 봄날 오후, 말을 타고 가던 선비가 문득 들려온 새소리에 고개를 들어 버드나무 위를 쳐다보는 그림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화선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이다. 선비는 단지 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숫제 넋이 빠진 얼굴이다. 그 표정은 단원의 다른 그림 '주상관매도'에서 절벽 위에 피어난 매화를 보고 있는 노인의 표정과도 닮아있다. 이 그림에서 선비가 쳐다보고 있던 새는 꾀꼬리다. 인적 없는 들길에 문득 울리는 꾀꼬리 소리였으니 순간적으로 흠씬 빠져들만 했겠다. 선비의 다정도 그렇거니와 선비를 시립하던 말구종 아이의 표정에도 경이로움이 배어 있다. 그림 왼편에 제시로 직접 쓴 단원의 시에는 "어여쁜 여인이 꽃 아래서 천 가지 가락으로 생황을 부나/ 운치 있는 선비가 술잔 앞에 밀감 한 쌍을 올려놓았나/ 어지럽다 저 황금빛 베틀 북이 수양버들 물가를 오가더니/ 안개와 비를 끌어다 봄 강에 고운 깁을 짰구나!"하고 적혀져 있다. 지극히 단원다운 섬세함이 묻어나는 시다. 단원의 그림을 보다보면 단원은 자신의 일상생활은 물론 조선의 땅과 물, 나아가 종교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그림의 소재였고 어떤 상황이건 그대로 감정이입해서 그림으로 재현하곤 했다. 그것은 단원이 그만큼 한 순간도 소홀히 스쳐가지 않고 꼼꼼히 관찰하고 느끼고 공감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것은 물론 화가로서 필요한 덕목임이 틀림없지만 보통 사람인 우리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우리네 생활이 그림 속의 선비처럼 유유자적할 수는 없지만 미친 듯이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을 지그시 누르고 잠시 멈춰서는 순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하고 읊었던 정현종 시인의 시구처럼 우리에게 다가온 그 꽃봉오리를 놓치지 않고 잠깐이라도 그 아름다움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도 힐링의 한 가지 방법이 아닐는지…. 그렇게 깊은 숨을 내쉬면서 돌아보면 내가 내려놓을 수 있는 것들은 뜻밖에 많을 것이다. 그 후에 내딛는 발걸음은 분명 방금 전과는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시간을 들여 어딘가 멀리 가지 않아도 지금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누구나 탐미주의자가 될 수 있고 언제 어디에서나 '마상청앵'의 순간은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 빗줄기는 보얗게 번지고 꽃잎은 하염없이 지고 있다.

김혜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