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7

편집부   
입력 : 2013-04-01  | 수정 : 201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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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육자진언과 본심

(문)육자진언이 본심입니까?
(답)육자진언을 행하면 본심이 일어나고 행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육자진언이 본심인지 아닌지는 내 안에 있습니다.(실행론 제1편 제2장 제3절)

'대승장엄보왕경'에 의하면 "육자대명은 관자재보살의 미묘본심이며, 이 본심을 알면 해탈할 수 있다"고 설한다. 또 근대에 육자진언으로 깨달음을 여신 회당대종사께서는 "육자진언은 모든 부처와 보살과 중생들의 본심"이라고 하였으며, 용성선사는 '육자영감대명왕경'에서 "육자진언은 모든 대각(大覺)과 모든 정사(正士)와 육도중생의 미묘본심이며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의 본원성품"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육자진언이 본심이라는 말이다. 육자진언이 모든 부처와 보살과 중생들의 본심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육자진언이 모든 부처와 보살과 중생들의 본심을 상징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종교적인 상징은 종교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종교적인 체험 내용은 해탈이며 초월의 경지이므로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려면 상징의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회당대종사나 용성선사께서 육자진언이 본심이라고 했을 때에는, 이러한 종교적인 체험이 없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회당대종사는 물론 용성선사께서도 육자진언의 이치를 체득했기 때문에 그러한 언설이 가능한 것이다.

회당대종사의 생애를 서술하고 있는 '불법(佛法)은 체(體)요 세간법(世間法)은 그림자라'라는 책자를 보면, 회당대종사께서는 여러 인연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경북 달성군 성서면 농림촌 도량에서 마지막으로 육자진언의 미묘한 이치를 체득하였다고 한다. 농림촌 도량에서 처음에는 49일의 기간으로 대중들과 함께 관세음보살 칭명염불로 정진하였다. 49일의 수행이 끝난 후 회당대종사는 관세음보살미묘본심진언인 옴마니반메훔 진언수행으로 전환하였다. 100일간을 기간을 두고 백 척의 낭떠러지에서 한 발짝 더 내딛는 심정으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였다. 100일 불공의 회향을 열 사흘 남짓 앞두면서 대종사는 서서히 말문을 닫다가 일주일을 남겨놓고는 말문을 아예 굳게 닫고서 하염없는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며 정진하던 대종사는 1947년 5월 16일 새벽이 가까이 오자 '도'(道)라는 말을 어렵게 하며 종이와 연필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대종사께서는 종이 위에 '도'자를 연이어 쓰더니, 신음소리와 같았던 '도'라는 소리도 점차 분명해지면서 우레와 같은 소리로 커졌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종이 위를 바라보니 '정도'(正道)라는 큰 글씨가 뚜렷하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회당대종사께서 육자진언을 본심이라고 설한 것은 육자진언염송을 통해 스스로 증득한 이러한 이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용성선사 또한 다르지 않다. '수심론'(修心論)에 의하면, 용성선사는 고운사의 수월영민(1817∼1893) 스님의 지도에 따라 천수주와 육자대명왕주 지송을 시작하였다. 남북으로 다니며 철저하게 지송하였으며 보광사(경기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도솔암에서는 다라니 지송수행에 전력하였다. 그러던 중 홀연히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의 근원, 사람의 근원, 깨달아 아는 것의 근원, 생각의 근원에 대한 의문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와 같은 의정(疑情)이 계속되다가 6일째 되는 날에는 문득 한 생각이 통 밑이 빠지는 체험을 하였으며, 그 경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도솔암에서의 이러한 체험은 다라니수행이 깊어지면서 스스로 의정이 일어나 마음의 근원을 체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용성선사가 육자진언이 본심이며 삼라만상의 본원성품이라 한 것 역시 이러한 깨달음의 체험이 바탕이 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회당대종사의 육자진언 수행에서는 참회의 과정이 매우 중요하며 육자진언삼매에는 참회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육자진언 염송을 통하여 본심을 깨닫게 하기 위해 세운 수행도량을 참회원이라 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본 문답에서 육자진언을 행하면 본심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하면 본심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입으로만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몸과 입과 뜻이 함께 하는 육자관행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몸으로 육자관행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진언행자는 육자관행을 위해 심인당에서 반가부좌로 앉는다. 그리고 금강합장을 하고는 교리참회를 하고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의 종자자를 행자의 몸에 각각 포자(布字)하며 오불 및 금강보살을 부른다. 이어서 비로자나불의 인계인 금강지권을 하거나 금강권을 한다. 금강지권인은 비로자나부처님의 본심에서 나오는 몸의 행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비로자나부처님의 가장 대표적인 몸의 행위를 행함으로써 중생의 행에서 비로자나부처님의 행으로 변화해 가며, 더 나아가서는 비로자나부처님의 본심으로 나아가게 된다.

입으로 육자관행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부처님의 본심진언이며, 보살의 본심진언이며, 중생들의 본심진언인 옴마니반메훔 육자진언을 크게 소리내어 염송하는 것이며, 자신의 귀에 들리도록 분명하게 소리내어 염송하는 것이다. 또한 입을 움직이지 않고 혀로만 소리내어 염송하는 것이며, 나아가 마음으로만 소리내어 염송하는 것이다. 옴마니반메훔 육자진언은 부처와 보살과 중생들의 본심에서 흘러나오는 가장 대표적인 소리이다. 불보살과 중생들의 본심에서 흘러나오는 가장 대표적인 소리를 냄으로써 중생들의 망심에서 흘러나오는 언행에서 불보살의 진실한 언행으로 변화해 가며, 나아가 불보살의 본심에 이르게 된다.    

뜻으로 육자관행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온 마음으로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을 관한다는 의미이다. 마음은 대승불교 이전에는 여섯의 마음으로 분류하였고, 대승불교에서는 여덟의 마음으로 분류하고 있다. 즉 눈의 마음[眼識], 귀의 마음[耳識], 코의 마음[鼻識], 혀의 마음[舌識], 몸의 마음[身識], 뜻의 마음[意識], 나 라고 집착하는 마음[末那識] 그리고 창고의 마음[阿賴耶識 혹은 藏識]이다. 그 가운데 중생들에게 있어서 말라식과 아뢰야식은 무의식의 세계이며, 나머지 여섯의 마음은 의식의 세계이다. 중생들이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을 관할 수 있는 것은 이 여섯의 마음을 통해서다. 말라식과 아뢰야식은 무의식의 세계이기 때문에 나머지 여섯 마음의 관을 통해서 변화해 갈 뿐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육자관을 행하는 마음은 의식의 세계인 여섯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눈의 마음 즉 안식으로 육자관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눈의 마음은 모양과 색깔을 식별한다. 그러므로 눈의 마음으로 관을 한다는 것은 불보살의 본심을 상징하는 종자자인 육자진언을 관하거나 불보살의 형상을 관하거나, 불보살의 덕성을 상징하는 금강저 등을 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 종단의 경우에는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을 신행의 본존으로 하고 있으므로 육자의 진언을 관하는 것을 종헌으로 명시하고 있다. 실제의 관에서는 자신의 몸에 포자되어 있는 그 글자와 관념하고 있는 육자진언의 그 본존과 일치하며 관념 관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육자의 여섯 진언을 관상하기 어려우면 육자 가운데 옴자를 관하기도 한다. 또한 육자진언의 실담문자를 관하기가 어려울 때는 육자진언의 한글문자를 관하기도 한다. 다음에 귀의 마음 즉 이식으로 육자관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의 소리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분명하게 관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코의 마음 즉 비식으로 육자관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비식은 냄새를 식별한다. 옴마니반메훔이 불보살과 중생들의 본심을 상징하므로, 그 본심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관념하며 관하는 것이다. 혀의 마음과 몸의 마음도 코의 마음이 육자를 관하는 방법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뜻의 마음 즉 의식으로 육자를 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식은 법을 분별하는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의식으로 육자진언을 관한다는 것은 육자진언 각 진언자에 배대되어 있는 오불과 금강보살의 법인 각각의 그 덕성을 관하는 것이다. 또한 불보살의 일반적인 덕성이라 할 수 있는 공성(空性) 그리고 그 공성에서 비롯하는 대자비와 대지혜를 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몸과 입과 뜻으로 옴마니반메훔 육자진언을 관행할지라도, 몸과 입과 뜻을 각각 따로따로 관행하는 것이 아니다. 몸과 입과 뜻을 함께 관행하여 삼밀관행이 되었을 때에 그 본심은 드러난다. 이렇게 심인당에서 반가부좌하고 육자 삼밀관행을 통해서 드러난 본심은 단지 몇 초, 몇 분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인당에서 잠시나마 드러냈던 그 본심을 잊지 않고 실생활 가운데에서도 그 본심에서 말하고 행동할 때 본심은 항상 드러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본심은 안과 밖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중생들은 항상 나와 너를 나누고, 나의 안과 밖을 나누기 때문에, 이러한 어리석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육자진언이 본심인지 아닌지는 내 안에 있다"고 한 것이다. 또한 육자진언을 염송하고 안 하고는 자신에게 달렸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다. 스스로 몸과 입과 뜻으로 육자진언을 삼밀로 관행하여 본심이 드러난 때에는 안과 밖이 따로 없으며 온 우주가 곧 본심인 것이다. 

실행론심화연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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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도원 정사


(콩트)모든 것은 자기 안에 있다


"본심을 찾으세요.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입니다."

등산을 하다가 잠시 쉬어갈 겸해서 그가 주저앉아 있을 때 마침 그 길을 지나쳐 가던 한 남자가 서슴없이 던진 말이 신경 쓰였다. 그는 산을 향해 올라가는 길이었고, 남자는 반대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가 남자의 뒤를 눈으로 좇았을 때 남자는 벌써 한참 멀리 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일행들에게 먼저 내려가 봐야겠다고 이야기하고는 그를 좇아서 내달렸다. 남자의 발걸음은 빠른 듯 했다. 그가 거의 뛰다시피 길을 내려가는데도 좀체 따라붙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 말씀을 좀 더 들을 수 있을까요? 조금 전 저에게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산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자세하게 좀 들려주실 수는 없는지요?"

간신히 따라 붙은 그가 남자의 앞을 막아서며 말을 걸었다.

"……."

"선생님이 조금 전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저들이 있는 곳을 지나칠 때 '본심을 찾으세요,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인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아, 그 일로 등산하시는 것을 포기하고 여기까지 좇아오셨군요.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등산이야 다음 주에도 하면 되지만 선생님을 만나보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을 좀 내주셔서 말씀을 좀 더 들려주십시오."

"……."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말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때 하셨던 말씀의 의미를 좀 들려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세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여서 그랬던 것입니다. 저를 좇아오시지 않고 등산을 해서 정상을 밟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일수도 있는데……. 제가 괜한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본심을 찾으라는 뜻은 무슨 말씀입니까?"

"누구나 그렇습니다. 수심이 가득해 보이는 분들을 보면 뭔가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자기만의 근심거리나 걱정거리들을 가득 짊어지고 있기 마련이지요. 심지어 닥쳐오지도 않은 일들을 두고 미리 골몰하면서 한 순간도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이 많지요."

"아, 예."

"제가 뭘 아는 사람은 아닙니다. 마음공부를 하면서 저도 조금 배운 것이 다입니다. 제가 하지 않아야 될 말을 한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선생님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흘러 나와버린 말입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입니다. 방금 하신 마음공부라는 것도 처음 들어보는 말이고요." 

"무소유라는 말씀은 혹시 들어보셨는지요? 말 그대로라면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말일텐데 현대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서는 생활을 할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소유를 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을 잘 분별해서 취사선택할 줄 아는 것이 무소유의 참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생활에 꼭 필요한 것만 취하는 것 말입니다. 욕심 내지 말고 분수껏 주변을 단속하는 삶이 필요하겠지요. 비우기만 할 것이 아니라 만족할 줄 아는 것이 더 중요하긴 하지만……. 무소유라는 말은 단지 물건만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마음가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소유하지 않아야 할 것은 번뇌, 망상, 온갖 헛된 생각들일 것입니다. 닥치지도 않은 먼 미래의 일을 미리 걱정하는 것도 어쩌면 소유하지 말아야 할 것 중의 하나이겠지요. 반면에 소유해야 할 것은 바른 생각과 정신으로 자족할 줄 알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아닐까요? 그러면 평상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본심이라는 것도 제대로 발휘될 수 있을 것이고요. 맑고 고요한 마음의 그림자는 얼굴로 드러나는 법이니까요. 그렇다고 선생님이 무소유를 실천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실 저는 걱정거리를 하나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얼굴에 그렇게 비쳐졌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걱정거리를 갖고 계신지 여쭈어봐도 괜찮을지……."

"남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큰 일입니다. 큰아들 놈이 하나 있는데 장가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서……."

"아, 예. 걱정거리일 수 있지요. 장성한 아들이 혼사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선생님으로서 걱정이 안될 수가 없지요. 남들은 손주를 본다느니 할 때면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렇지요.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는 그 때서야 자기를 알아주는 동지를 만난 듯 만면에 화색을 띄며 남자의 턱밑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암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안색이 지금 아주 좋아졌습니다. 마음의 짐을 그냥 내려놓을 수야 없겠지만 가급적 삭히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아까 보니까 좋은 친구들도 많으시던데 말씀을 하시면서 툴툴 털어 버리세요. 스트레스가 될 만한 마음의 짐들은 가급적 벗어버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마음공부라는 것도 필요한 게지요."

"마음공부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물론 종교단체 등 여러 곳에서 이론적 체계를 만들어 가르치고 하는가 봅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어렵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좋은 마음, 즐거운 마음, 기쁜 마음, 환희에 찬 마음을 갖도록 순간 순간을 점검하고 단속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어진 생활을 전폐해서는 절대 안 될 말이고요. 건강한 생활에 전념하면서 주변이 안정적일 때 마음도 안정될 수 있기 때문이니까요. 선생님께서 어떤 종교적 믿음을 갖고 있으신 줄은 모르겠습니다만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니, 평상심이니, 본심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 이를 바탕으로 한 말일 것입니다. 심공, 곧 마음공부를 강조하신 진각성존 회당 대종사께서는 그래서 나의 마음이 넓고 크고 둥글고 차면 나의 집도 넓고 크고 둥글고 차다는 말씀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한 마디로 표현한 숱한 말 중의 백미가 아닐까 합니다. 다만 제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말에도 힘있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진언이라고 한다는데 본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이 진언을 염송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 말씀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늘 제가 너무 많은 말을 괜히 한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용서하십시오."

"저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요. 일행들이 산을 내려오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은 듯도 하고……."

"제가 뭘 알기나 합니까만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어릴 적에는 '아기를 업고 아기를 찾는다'는 말도 듣고 자랐지 않습니까? 누구나 먼지에 쌓여 있고 때에 절여 있는 마음을 깨끗이 닦아내 본심이라는 것을 찾아 주어진 삶에 맞게 열심히 살아간다면 그 세상이 개인에게는 극락일 것이요, 사회적으로는 화엄의 세계일 것입니다.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일' 같은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심도, 복락도 모두 자기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