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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편집부   
입력 : 2013-03-15  | 수정 : 2013-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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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모처럼 처마 밑의 풍경이 고요하다. 차 한잔을 우려놓고 건축가 승효상의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를 읽는다. 책 속의 내용은 그가 건축적 모티브를 얻거나 성찰하기 위해 떠났던 여행 얘기가 중심이다. 그가 들렀던 유럽의 도시들과 수도원, 그리고 스톡홀름에 있는 우드랜드공동묘지를 비롯한 유럽의 묘지들 혹은 우리나라의 오랜 절집이며 폐사지와 같이 그가 진심으로 감탄하는 것은 제대로 비워진 건축물들에서다. 건축가인 그의 직업을 생각하면 의외일 수 있지만 항상 그가 지향하는 것은 집을 세우는 건축(建築)이 아니라 삶의 집을 짓는 영조(營造)였으므로 그래서 그가 추구하는 비움의 깊이와 맑기는 도저하기만 하다. 언뜻 봐선 짚어낼 수 없는 '불가해한 비움'이다. 하지만 비움이 어찌 불가해할 수 있겠는가. 그곳에 이르기는 어려워도 확인하기는 일순간인 것을. 비단 건축물 얘기만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미얀마의 마하간다용수도원에서 극명하게 느꼈다. 이 년 전 불적지 순례팀을 따라간 미얀마 일정은 사흘째 들렀던 마하간다용수도원이 정점이었다.

우리는 아침 일찍 만달레이에 도착했고 그 날 첫 일정이었던 수도원을 둘러보던 중 공양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들의 공양의식은 시종일관 침묵 속에서 장엄하게 진행되었다. 그 많은 수도승들과 수도원 생도들이 움직이는데도 공양간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들의 어깨 위로 맑은 햇살만이 와랑와랑 부서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도승들이 직접 탁발을 나가 발우에 채워오지만 그 날은 수도승의 부모가 보시를 하는 날이어서 탁발을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얼핏 보기엔 우리네 양푼보다 더 큰 그들의 발우에 담긴 공양물로 수도자는 물론 인근 거지며 개들까지 그 날의 양식으로 삼는다고 했다. 그들의 나눔이 진심으로 숙연해지는 순간이었다. 일주일의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온갖 아름다운 풍광들이 눈앞을 스쳐갔지만 단언컨대 그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그 찬연한 비움이라니. 그 길은 어쩌면 내게는 언감생심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기에 나는 오늘도 꿈꿔본다. 너무도 나약한 인간이기에 아직도 내 안을 휘젓는 욕망을 내려놓고 나를 현혹시키는 온갖 껍데기들을 던져버리고 서서히 비워갈 수 있기를. 잔잔하던 풍경이 선들선들 움직이기 시작한다. 바람의 기척이다. 나도 이제 움직여야겠다. 김혜완 소설가

*폴 발레리의 싯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