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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운 세상 만들기

편집부   
입력 : 2013-03-01  | 수정 : 2013-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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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큼 보편적인 테마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TV드라마, 잡지에도 사랑이라는 테마가 난무하고 있다. 사랑에 울고불고 했던 20대를 생각해 보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생소해 질 때도 있다. '사랑'이 넘쳐흐르다 보니 도대체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여러 미디어를 장식하고 있는 사랑은 불륜을 비롯한 애욕이 넘치는 이야기들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 왜곡되고 변질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며 무엇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며 사랑을 베푸는 자세는 어떠한 것일까.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박애를 설하고 불교에서는 자비를 설하고 있다. 거기에는 매우 차원이 다른 숭고한 박애, 숭고한 자비라는 것이 설해져 있다. 게다가 현대사상이 일반적으로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러한 경향은 근대의 여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 중세는 어느 쪽인가 하면 인간의 감정이나 욕망에 대해서 억압적인 경향을 띄고 있다. 그런데 그것에 반항해서 생겨난 서양의 근대사상은 인간의 사랑을 정면으로 들고 나왔다. 어느새 우리나라에서도 사랑을 중요한 가치기준으로 삼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세계 각국으로 통하는 하나의 경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럼 불교에서는 사랑을 어떻게 보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불교는 사랑에 대해서 억압적이고 금욕적이라고 한다. 일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면도 있겠지만 불교계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불교에서는 자비를 설하고 있지만, 적어도 사랑을 뜻하는 애(愛)가 그다지 많이 이야기되어 있지 않다.

우선 한자 애(愛)의 뜻을 알아보기로 한다. 한자 애(愛)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랑할 애, 사랑 애, 그리워할 애, 아낄 애 등으로 쓰이며 즐기다 라는 뜻도 있다. 한자 애(愛)는 기(목멜 기)+심(心)+쇠(천천히 걸을 쇠)로 된 형성문자로 기(목멜 기)는 머리를 돌리어 돌아다보는 사람의 상형으로 되돌아다 보는 마음의 모양에서 어여삐 여기다 라는 뜻이고, 쇠(천천히 걸을 쇠)는 발의 상형으로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 향해 가서 미치다 라는 뜻을 나타낸다고 쓰여져 있다. 뭔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앞으로 발을 내딛어 갈 수도 없는 모양, 발을 질질 끌며 제대로 앞으로 가지 못하는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사랑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흔히 사랑 애(愛) 대신에 그 이상의 숭고한 정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자비(慈悲)를 설하고 있다. 자비(慈悲)의 자(慈)가 갖고 있는 원래의 의미는 친구(友)라는 뜻이 있으며 진실한 친구사이에 성립되는 순수한 애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것을 한자로 자(慈)라고 쓰기 시작했으며, 인(仁)에 가까운 관념이라 하여 자인(慈仁)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비(悲)는 가엽고 불쌍하고, 궁핍하고 괴로운 뜻으로 쓰인다. 그러니까 자비(慈悲)라는 것은 사람이 곤경에 빠져 슬퍼할 때 자신도 함께 슬퍼하며, 사람이 괴로워하고 있으면 '아 참으로 불쌍하다' 하고 동정하게 되는 마음일 것이다.

즉 자비(慈悲)의 자(慈)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 또는 나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비(悲)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그것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적용시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우리 마음속에는 늘 자비심이 자리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를 들어 모르는 사람이 길거리에서 길을 물어온 적이 있을 것이다. 상대방은 길을 몰라 곤란에 처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럴 경우 자신이 알고 있으면 대부분 알려준다. 그때의 마음은 순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알려주면서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바란다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자비라 할 수 있다.

이즈음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이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 바로 '자비'라고 할 수 있다. 너무 많아 주체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사랑을 자비를 통해서 이해한다면 어떻게 사랑하고 만들어가야 할지가 훨씬 명료해 질 것이다.

이정희 위덕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