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6

편집부   
입력 : 2013-03-01  | 수정 : 2013-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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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육자진언과 자성불


말법시대 불교는 다라니로써 흥왕(興旺)한다. 내 마음은 고통 속을 헤매고 번뇌 속을 헤매고 있다. 육자진언의 밝은 광명으로 내 마음의 부처를 찾아라. 육자진언은 모든 부처와 보살과 중생들의 본심이다. 이 본심진언으로 나의 본심을 찾자. 나에게 있는 자성불(自性佛)은 자비와 지혜와 광명을 발한다. 이 자성불이 과거 나의 모든 죄업을 알고 현재에 내가 짓는 것도 안다.('실행론' 제1편 제2장 제2절 가)

회당 대종사께서는 오늘날과 같은 말법시대에 자성을 밝히고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으로서 다라니불교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많은 진언다라니 가운데서도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을 으뜸가는 진언으로 삼았다. 육자진언은 모든 부처와 보살과 중생들의 본심이라고 하였다. 같은 시대에 용성선사 또한 '육자영감대명왕경'에서 육자진언은 모든 대각(大覺)과 모든 정사(正士)와 육도중생의 미묘본심이며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의 본원성품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대각은 부처님을 의미하며 정사는 보살을 의미한다. 원래 옴마니반메훔 육자진언은 '대승장엄보왕경'에서 관자재보살미묘본심으로 설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경전에서는 분명 관자재보살미묘본심진언이라 한 것을 두 분 선각자는 어떠한 근거로, 그리고 어떠한 의미에서 부처와 보살과 중생들의 본심진언이라고 하였는가?

먼저 진언다라니 자체를 가장 깊고 비밀한 관점에서 해석하는 방법이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진언다라니는 법이자연(法爾自然)의 참된 모습이며, 부처님의 진실한 경전이며, 여래께서 비밀한 가운데 설하시는 법의 모습이다. 이때 진언다라니 속에는 모든 법이 그 속에 함장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부처님의 서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총지문이라 하며 진언다라니의 의미는 다 해석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도액은 '현밀원통성불심요집'(顯密圓通成佛心要集)에서 "모든 진언다라니는 다 비로자나불의 심인"이라 하였으며, 공해는 '성자실상의'(聲字實相義)에서 "진언이 무량하여 차별이 있다 하여도 그 근원을 찾아가면 대일존의 해인삼매왕의 진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설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육자진언은 대비로자나의 진언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5종진언설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방법이다. 5종진언설에서 보면, 하나의 진언다라니라도 이를 이해하고 알아차리는 얕고 깊음의 차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그 차이가 있게 되지만, 진언다라니 자체는 물론 이를 이해하고 알아차리는 제 각기의 주체적 입장에서는 모두가 진언다라니의 깊은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그 어느 하나의 입장으로 들어가더라도 거기에 일체의 법문이 갖추어지고 결국은 비로자나불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밀교의 만다라상에서 볼 때 모든 불보살은 비로자나불의 한 덕성을 나타낸 것으로 비로자나불의 한 구체적인 활동상이며 나아가 그대로 비로자나불의 몸이 된다. '대승장엄보왕경'에서도 육자진언이 관자재보살의 본심진언이기는 하나, 이는 관자재보살을 통하여 중생세계에 전하고자 하는 것이며 육자진언이 관자재보살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보왕경'에서는 육자대명을 관자재보살이 가졌다든가, 관자재보살은 육자대명에 잘 머문다고 설하고 있다.

이상의 점들을 근거로 해서 육자진언은 대비로자나불의 본심진언이며 제불보살의 본심진언이며 또한 모든 중생들의 본심진언이라 한 것이다.

'대승장엄보왕경'에서 육자진언은 관자재보살의 미묘한 본심으로서 이 미묘한 본심을 아는 자가 있으면 곧 해탈하는 것이라 하고 있다. 또한 육자대명왕다라니를 얻어 거기에 머물면 반드시 원적지(圓寂地)를 증득할 것이며, 그것을 얻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과 같고 해탈문에 들어 열반의 경지를 보게 되고 일체지지(一切智智)의 연설이 다함이 없다고 하고 있다. '대승장엄보왕경'에서 설하고 있는 이와 같은 내용에서 본다면 육자진언은 관자재보살의 미묘본심으로서 곧 관자재보살이 지니고 있는 부처의 성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의 성품이란 관자재보살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며 관자재보살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육자진언은 진언의 왕이며 일체의 본모(本母)이고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에서 얻어지는 정미(精米)와 같은 것이다. 또한 육자진언은 부처의 성품 그 자체이며 보살의 본래의 성품 그 자체이고 중생의 본래의 성품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진각성존 회당 대종사는 "이 육자의 다라니는 부처와 및 제보살과 중생들의 본심이라. 일체법을 다 가져서 법계진리 만사만리 구비하여 있으므로 팔만사천 모든 경전 육자진언 총지문에 의지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비록 말법시대의 중생으로서 고통 속에서 헤매고 번뇌 속에서 헤매고 있을지라도 그 본심은 청정무구한 것이다. 그와 같이 번뇌 속에 잠재해 있는 중생들의 청정무구한 본심은 본심진언인 육자대명왕진언 염송을 통해서 밝힐 수 있다. 육자진언이 곧 모든 부처와 보살과 중생들의 본심이기 때문이다. 육자진언을 통하여 삼밀수행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때 본심은 드러나게 된다. 이것은 곧 자성부처님이 현현하는 것이며, 그에 따라서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와 광명을 온누리에 펼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 자성을 밝히고 내 허물을 깨치고 모든 것을 성취하게 되는 것은 육자진언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 이 자성불은 참으로 미묘하여 과거의 모든 죄업과 현재에 짓는 것도 분명히 안다. 내 마음의 불심인(佛心印)과 내 허물을 깨친다. 불심인이 내 마음의 주인공이 되어 자리 잡고 있으면 중생심은 도망간다. 육자진언은 본심을 밝혀 심인진리를 깨닫게 하는 진리이다.('실행론' 제1편 제2장 제2절 나)

본 말씀은 다른 어떤 진언보다 육자진언을 통하여 불심인을 깨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회당 대종사께서 육자대명왕진언 옴마니반메훔을 통하여 몸소 깨쳤기 때문이다. 또한 육자진언은 회당 대종사께서도 말씀하신 것과 같이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4불과 일체의 금강보살을 상징하며, 부처와 및 모든 보살 그리고 중생들의 본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자대명왕진언을 두고서 다른 잡진언을 염송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불심인 즉 부처님의 심인은 곧 우리 중생들의 심인이다. 다만 우매한 중생들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회당 대종사께서는 육자진언 염송을 통하여 실제로 자내증하시고는 우매한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심인은 곧 다라니를 내 마음에 새겨있는 불심인인 삼매왕을 가리켜서 말한다"고 설하셨다. 이는 온 우주에 충만하여 없는 곳이 없는 법신 비로자나부처님과 중생이 심인이라는 마음의 상태에서는 결코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중생의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과 둘이 아닌 상태 즉 심인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수행과정을 통하여 삼매왕에 들어가야만 가능하다. 회당 대종사께서는 그러한 과정을 "삼밀로써 내 마음에 항상 인을 새겨 가진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육자진언을 구밀로 하여 삼밀로써 수행해 가면 육자선정에 들게 된다. 육자선정에 들게 되면 여실하게 자심을 알게 되고, 이와 같이 육자선정 속에 여실하게 자심을 안다는 것은 곧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 상태인 심인을 확인하여 아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과거의 모든 죄업은 물론 현재의 모든 사실도 또한 깨닫게 된다. 이것은 법신 비로자나불이 당체로서 우리들에게 설법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실하게 자심의 실상을 알아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님을 알았을 때, 우리는 비로자나부처님으로서의 내 자신이 아닌 중생으로서의 내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온 지금까지의 내 잘못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내 마음의 불심인(佛心印)과 내 허물을 깨친다 고 말한 의미이다. 내 잘못 즉 허물을 깨치고서 마땅히 지심으로 참회하게 되며, 또한 참회를 바탕으로 생활 속에 실천해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각종 수행에 있어 참회는 육자진언 염송을 중심으로 하는 삼밀수행을 통해 당체법문의 이치를 깨달았을 때 얻게 되는 공덕이다. 또한 동시에 참회를 생활 속에 실천해 가는 것은 심인진리를 확인하는 과정이며 심인진리의 구현이다. 이와 같이 불심인을 마음의 주인공으로 하는 삶은 곧 부처님의 삶이며, 육자선정 속에서 심인진리를 구현하고 있는 삶이다.

법을 전하는 방법은 육자선정(六字禪定)으로 한다. 산을 보고 염송하면 산이 제도되고 들을 보고 염송하면 들이 제도된다.('실행론' 제1편 제2장 제2절 다)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것은 육자진언 염송을 통하여 불심인이 드러난 삼매왕에서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육자진언 염송을 통하여 육자선정에 들었을 때만이 자심을 여실하게 알게 되고,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이 당체로서 설법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을 보고 육자선정에 들면 산이 비로자나부처님의 설법이며 들을 보고 육자선정에 들면 들이 비로자나부처님의 설법이 되는 것이다.  

실행론심화연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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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도원 정사


(콩트)"진심을 보여주세요"


'하면 된다'는 말이 한때 신조처럼 풍미하던 시절이 있었다. 외세의 침략에 의한 강탈과 동족간의 전쟁으로 인한 피폐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때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고 노래하면서 희망과 용기를 부추기던 말이다.

'하면 된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쯤은 서연이도 잘 안다. 어떤 경우 건 행위가 가해지면 결과는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리적 행위뿐만 아니라 한 생각을 일으키더라도 그에 따른 변화는 당연히 뒤따르기 마련이다. 결과가 좋고, 좋지 않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작용에 따른 반응이 나타나는 것은 분명한 것이기에 '하면 된다'는 말 또한 진리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서연이의 지론이고 평소 생각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강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의 본뜻은 자신이 생각했던 기대치에 못 미친다고 내뱉는 넋두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나, 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노력하거나 고집한다고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이 때는 안 되는 그 자체가 진리다. 안 될 것은 안 되는 결과로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마른 모래더미에 물을 붓는다고 해서 금새 차 오르지 않는 이치처럼, 밑바닥부터 차야 언젠가는 넘쳐나는 게 이치이지 않는가? 빚꾸러기가 적자인생을 마감하고 흑자인생으로 돌아앉기 위해서는 빌려쓴 것만큼 갚은 뒤라야 가능한 것처럼……. 계산적으로도 마이너스 십(열)에 십(열)을 더해봐야 결과는 '영(零)'일 뿐이다. 이것이 인연과(因緣果)의 이치다. 그 때문에 서연이는 '하면 된다'는 말이 자칫 포기하거나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단히 노력하며 정진하자는 응원과 다짐, 부채질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당신 말에는 통 진심이 없어."

'하면 된다'는 진리도 알고, 인연의 이치도 아는 서연이가 도무지 알 수 없고, 믿지 못할 것은 남편의 마음이었다. 남편은 아무리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한다고 강변해도 도대체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아 보였다. 남편을 믿지 못하는 까닭이 서연이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은 남편도 잘 알았다. 집에만 들어오면 꼼짝도 않는 위인이 밖에서는 누구보다도 가정적인 양했던 것은 자신이 더 잘 알았다. 자상하기까지 하면서 모든 것에 있어 완벽한 것처럼 구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되먹지도 않은 배포며 말을 앞세우는 허풍은 차고도 넘쳤다.

"이제 무조건 빨리 들어와서 일을 도울게."

첫 아이를 낳았을 때 했던 남편의 말은 채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의 뜻조차 모르는 사람 마냥 남편은 병원에서 퇴원하던 그 날부터 늦은 귀가를 반복했다. 첫째 날은 병원에 들렀다가 오후에 출근했기 때문에 쌓인 일이 많았다고 했다. 거기까지는 이해를 한다고 치더라도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늦은 귀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연이가 듣기에 핑계로밖에 치부할 수 없는 남편의 이유는 가지가지였다. 득남을 했다고 회사에서 회식이 있어서, 먼 곳에서 친구가 찾아와서……. 끌어다 붙일 수 있는 말은 뭐든지 가리지 않고 죄다 끌어들이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다반사로 하던 야간업무에도 불구하고 용케도 밖에서 잠을 자고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벼룩도 낯짝은 있다'더니 이른 귀가는 지킬 수 없겠다 싶었는지 벼랑 끝에서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격으로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었다.

"휴일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집의 모든 일은 내가 다할 테니 당신은 아기만 보면서 편히 쉬어."

옛말 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첫 번 째 쉬는 날 엉덩이를 집안에 눌러 붙이고 있던 남편은 오전 내내 잠을 잤다. 친정어머니가 안방과 거실, 주방을 분주하게 오가며 산후 뒷바라지를 할 때도 남편은 건넌방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점심나절이나 돼서야 방에서 나온 남편은 쑥대머리를 하고서는 차려준 밥을 먹고 거실을 오가며 할 일을 찾는 둥 하다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다가 서연이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쓰레기봉투를 만지작거리다가 제자리에 놓고는 다시 소파에 파묻혀서는 시간을 죽였다. 그 날 남편이 한 일이라고는 저녁을 먹고 분리수거 된 쓰레기봉투를 아파트 쓰레기장에 내다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당신이 뭘 하겠어, 하는 생각에서 서연이는 울컥 화가 났지만 젖먹이 아기를 생각해서 참았다. 스트레스를 안 받기 위해서였다. 행여 화를 내서 아기가 먹는 젖에 영향이라도 미칠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잖아도 친정어머니를 봐서 참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당신, 나 좀 봐요."

하루종일 종종걸음을 치며 바삐 움직이던 친정어머니가 잠시 몸을 누이는 틈을 타 서연이가 남편을 베란다로 불러냈다. 참고 또 참다가 그냥은 잠을 이룰 수 없을 듯해서였다.

"찬바람 쐬면 안 되는데……."

"그건 걱정돼요?"

"걱정되지……. 미안해, 내가 뭘 하려고 해도 할 줄 아는 게 없네……"라며 남편은 말끝을 흐렸다.

"그건 됐고. 바라지도 않아. 이제는. 그나저나 엄마 내려가실 때 수고비나 단단히 준비해. 얼마를 생각해? 결정이 되면 말해. 두고 볼 거야. 사람이 염치는 있어야지."

서연이는 저도 모르게 거칠게 반말을 내뱉었다. 바람을 많이 쏘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멍하게 서 있는 남편을 남겨 두고 거실로 휑하니 들어갔다. 안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뒤돌아보니 남편은 그냥 그렇게 붙박이처럼 서 있었다. 창문 너머 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남편의 뒷덜미가 느닷없이 몬다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무게가 어깻죽지에 덧씌워져 있는 말이나 소처럼 보인 것이다. 눈물이 핑 돌면서 너무 내질렀나 싶었다.

"(문)부군에게 유순함은 무슨 복덕 있습니까? (답)자녀들이 수순하고 창성하게 되나이다."

순간 서연이는 늘 읽고 숙독하기까지 했던 '진각교전' 실행론에 있는 이 법어를 떠올리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집안에서 내놓은 불효자라 하더라도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어떤 사람이 그에게 효도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해주면 그 역시 기뻐한다는 말은 그 불효자도 마음으로는 효도가 착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 다산 선생의 말도 뒤따라서 생각났다. 서연이는 결혼할 당시를 그려보았다. 티 없이 맑고 순진해 보였던 그 사람을 다시 그려보게 되면서 그동안 크게 속을 썩이지도 않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더군다나 나름대로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살아왔다는 점에서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방안에서 빈둥대거나 거실에서 널브러져 있을 때와는 달리 베란다에 서 있는 남편이 측은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한 공간 안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던 기분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두니 달라진 것이다. 금새 참회가 됐다.  

"이제 무조건 빨리 들어와서 일을 도울게. 휴일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집안의 모든 일은 내가 다할 테니 당신은 아이만 보면서 편히 쉬어"라고 했던 말이 남편의 진심이었다고 믿어주고 싶었다. 무조건 집에 빨리 들어오고 싶었으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고, 휴일마다 집안 일을 하고 싶었으나 몰라서, 힘에 부쳐서 못했을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진심이 들여다보인 것이다. 한 발만 물러서서 되돌아보면 별 것도 아닌데 왜 아옹다옹했는가 싶기도 하면서 붓기가 빠지지도 않은 서연이의 두 볼에 참회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