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4

편집부   
입력 : 2012-12-29  | 수정 : 2012-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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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진언다라니의 공덕


1)진언은 진실한 법
(가)진언(眞言)은 불(佛)의 참된 말씀이니 그 속에는 실로 무량한 공덕이 포함되어 있다. 중생의 얕고 가벼운 지식으로는 쉽사리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영묘불일(靈妙佛日)의 진실한 말씀이다. 중생들의 말 속에는 속임과 거짓이 많으나 불(佛)의 말씀에는 거짓이 없다. 중생들을 속이지도 않으며 정확하고 진실한 법이니 외우기만 하면 공덕은 저절로 일어난다.
(나)진언을 외워 마음의 진리를 깨달으면 우물물이나 샘물처럼 아무리 퍼 써도 없어지지 않는 법이 솟아 나온다. 보이지 않는 법신(法身)은 진언을 듣고 있으니 계속하여 외우면 자연히 희사하는 지혜를 행하게 된다.

진언은 범어 만트라(mantra)를 번역한 것으로, 중기밀교 즈음에 비드야(vidya), 다라니(dharai), 만트라(mantra)의 세 가지 기능을 모두 가리키는 술어로 번역된 것이다. 만트라는 원래 인도 고대 최고의 문헌인 리그베다(Rg-veda)의 시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는 시성(Rsi)들이 신의 계시에 의하여 받은 천계(天啓)의 언어로 인식되었으며 성전 그 자체, 신성한 자구, 기원문, 찬가 등 광범위한 의미 내용을 가지게 되었다. 브라흐만의 제식의례에서 만트라는 의식사(儀式師)들의 의례행위와 사념을 연결하는 기능, 즉 천계의 언어로서 신을 부리는 도구의 기능을 가졌다. 여기서 만트라는 주문의 형태를 가지고 세간적인 기원을 성취하여 주는 주술로서 사용하게 되었다. 초기불교시대에 석존은 출가수행자가 브라흐만의 만트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것은 브라흐만들이 동물의 희생제의와 만트라의 염송을 통한 제사의식이 사회생활 전반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고 여기는 제식만능주의가 팽배함에 따라 이에 대한 반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석존은 브라흐만들이 만트라염송을 포함하는 동물희생제의를 통하여 생활하는 것은 삿된 직업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하여 금지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수행자를 보호하고 교단을 보호하는 주문은 방호주(防護呪·paritta)라 하여 허용하면서 브라만의 만트라와는 달리 하였다. 또한 진실을 바탕으로 한 진실어(satya-vacana)에 대해서도 주문의 기능을 허락하였다. 그 이후 대중부나 법장부 등의 부파불교에서는 경율론(經律論)의 3장(藏)에 주장(呪藏)을 더하고 있으며, 대승불교에서는 세간적인 서원은 물론 출세간적인 성불의 기능으로서 만트라를 비롯한 다라니 등의 주문들을 불교에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아가 중기밀교에서는 진언을 통한 삼밀수행이 즉신성불로 가는 주요한 수행체계를 이루게 된다. 밀교에서 만트라는 진언(眞言)으로 한역되면서 그 기능도 또한 주술적 기능에서 주법적 기능으로 변화하였다. 제진언진언법이(諸眞言眞言法爾)라는 진언교학이 성립하면서 모든 진언은 그 자체 법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간주하였다. 법이로서의 법성 그 자체는 그대로 제불의 깨달음의 경지이므로 진언은 그 깨달음의 경지를 즉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나아가 진언 그 자체가 불격(佛格)을 상징하는 의미로 발전해갔다.

본 회당 대종사의 말씀은 진언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진언염송을 통하여 염혜력이 발생함을 나타내고 있다. 즉 진언은 부처님의 참된 말씀이므로 무량한 공덕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중생들의 말은 탐진치에 물든 것이라 거짓이 있고 속임이 있으나, 부처님의 말씀은 일체 번뇌를 떠난 자성청정심에서 나온 진실한 말씀인지라 거짓이 있을 수 없다. 특히 진언은 불심인에서 울려 퍼지는 그것 자체이므로 중생들은 그것을 외우기만 하여도 공덕을 입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언행자는 진언을 항송하여 여실히 자심을 알아갈 때 염혜력은 증장하게 된다. 진언염송은 곧 나의 본심을 드러냄이며 법신 비로자나부처님과 소통함이기 때문이다. 진언염송이 항송으로 계속 이어질 때 탐진치는 소멸되고 법신 비로자나부처님과의 소통은 더욱 원만해지며 염혜력 또한 그에 따라 원만해지는 것이다.

2)다라니의 공덕
다라니는 모든 것을 갖는다. 경전의 모든 요소를 한 글자에 담아 무량의 뜻과 일체의 공덕을 가지고 있다. 신성한 부처님의 말씀 속에는 실로 무량한 공덕이 포함되어 있다.

다라니(dharai)는 총지(總持)라고 번역되는 것과 같이, 모든 것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은 물론 말씀이 뜻하는 내용, 말씀에 대한 이해와 실천, 삼마지를 얻고 괴로움를 멸함 등의 일체를 가리킨다. 그러한 점에서 다라니는 한량없는 뜻과 한량없는 공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복덕은 세간적인 지혜이기 때문에 복을 지은 만큼 되돌려 받으며(自業自得), 다 되돌려 받고 나면 다시 또 다른 복을 지어야 한다. 또한 항상 업(業)을 남기기 때문에 윤회전생하게 된다. 공덕은 출세간의 지혜이기 때문에 삼업이 청정하여 업을 남기지 않으므로 윤회에서 벗어나게 된다. 공덕은 "안으로 망념(妄念)을 극복하는 수행을 공(功)이라 하고, 밖으로 다툼이 없는 인격을 베푸는 것이 덕(德)이다"라고 하며, 또는 "성품(性品)을 보는 것(見性)을 공(功)이라 하고, 지혜의 묘(妙)한 작용을 덕(德)이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공덕에 대하여 일찍이 달마대사가 양무제를 만나 나눈 일화가 회자되고 있다. 아래의 내용은 용성선사가 '각해일륜' 제사권 육조단경 요역 중에서 설하신 내용이다.

어느 날 소주자사(韶州刺史) 위거(韋據)가 관료(官僚), 사서(士庶) 등과 함께 육조 혜능성사에게 공경히 예배하고 여쭈었다.
"제자들이 의심이 있사오니 자비로 가르쳐 주옵소서."
성사(聖師)가 말하였다.
"의심이 있거든 곧 물어라."
위공이 말하였다.
"성사의 말씀이 달마조사의 종지가 아니옵니까?"
성사가 이르기를 "그러하니라" 하셨다.
위공이 말하였다.
"양무제가 달마에게 묻되, '짐이 일생에 가람과 탑묘를 많이 조성하며 성공과 보시를 많이 하였으니 무슨 공덕이 있습니까?' 하니, 달마가 답하시기를 '털끝만치도 공덕이 없느니라' 하시니, 이것이 의심이로소이다."
성사 이르시되 "양무제가 마음이 삿되어 정법을 알지 못하고 일생에 복 짓기만을 힘쓰니, 복은 내생에 받을지라도 무루공덕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공덕과 복덕이 다른 것을 자세히 들어 보아라. 공덕은 법신 자성을 깨친 데 있고 복 짓는 데 있지 아니한 것이다. 나의 본성을 보는 것이 공(功)이 되고 평등심을 행하는 것이 덕(德)이 됨이니, 생각 생각이 걸림 없이 항상 본성의 진실과 묘용을 보는 것이 공덕이 되는 것이니라. 내심으로 겸양하고 하심하는 것은 공이 되고 밖으로는 예를 행하는 것이 덕이 되며, 자성이 만법을 건립하는 것은 공이 되고 심체(心體)가 걸림 없는 것이 덕이 되며, 자성을 여의지 아니하는 것은 공이 되고 쓰는 데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 덕이 되는 것이니, 만일 공덕과 법신을 찾고자 한다면 이와 같이 닦으면 참다운 공덕이 되는 것이다. 참다운 공덕을 닦는 사람은 경만심이 없어 널리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생각하나니, 만약 경만심이 있어 아상을 끊지 아니하면 공이 없는 것이며, 자성이 진실하지 못하면 덕이 없는 것이니 '나'라고 하는 아상이 있어 항상 일체 사람을 경멸히 여기는 까닭이니라. 생각 생각이 자성에 어두워 어리석지 않아 간단이 없는 것이 공이 되고 평등히 곧은 것을 행하는 것이 덕이 되며, 스스로 성품을 닦는 것이 공이 되고 스스로 수신(修身)하는 것이 덕이 됨이니, 공덕은 자성을 보고 수련하는 데 있는 것이며 보시공양으로 구할 것이 아니다. 공덕과 복덕이 다르거늘 양무제가 참다운 이치를 알지 못하고 묻는 것이므로 달마대사의 허물이 아니니라."
위의 말씀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다라니수행은 한량없는 공덕을 가져온다. 이것은 다라니수행을 통해 본심을 밝히기 때문이다. 즉 심인을 밝히는 공부, 마음을 밝히는 공부가 되었을 때 공덕이 무량한 것이다. 그렇다면 복덕은 쌓아지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런 말씀이 아니다. 복덕을 쌓고자 희사하고 염송할지라도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버리고 실행했을 때만이 복덕은 물론 공덕도 또한 따라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복덕을 구하고자 염송하지만 상(相)을 냄으로써 복덕은 물론 공덕도 쌓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진언행자는 이 이치를 바르게 알아 상(相)을 버리는 바른 실행을 통해 복덕은 물론 공덕을 쌓는 삼밀수행이 되어야 한다.        

실행론심화연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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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도원 정사



(콩트)거짓부렁의 말로


길은 어디에나 있다. 누군가가 개척해 놓은 길을 열심히 잘 좇아가는 사람 앞으로 길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길 끝에 새로운 길이 항상 나있기 때문이다. 없는 길도 스스로 찾거나, 만들어 가는 사람 앞에도 길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개척하면 새로운 길은 얼마든지 찾아지는 것이 순리인 까닭이다.

그러나 잘 나가던 길 위에서 한 순간 제동이 걸려버려 뼈저린 시련을 겪어본 사람 눈에는 도무지 새로운 길이란 없어 보일 수 있다. 나약하거나 맥이 풀려서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안 보일 수도 있고, 힘들거나 지쳐서 도무지 길을 좇을 수 없는 탓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은 막막하기만 할 뿐이다. 한 번 길을 잃고 천지사방을 둘러보았을 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 자리에서 고약하게 맴돌기만 할 때도 다른 길은 그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지나온 길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안주하는 사람들 앞에도 더 이상 새로운 길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눈이 멀어버린 이유에서다.

일각수 영감이 처한 경우가 그랬다. 일각수 영감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턱밑에 귀를 바짝 갖다대고 들어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힘없고 맥빠진 한숨이었다. 걸을 힘도 없었지만, 걸어 가야할 길조차 보이지 않아 꼬꾸라질 듯한 몸을 간신히 가누며 멈칫하는 순간 앞으로 기울었던 온 몸의 힘이 지팡이로 쏠렸다. 그 순간 몸 전체를 지탱하고 있던 지팡이보다 못한, 흐느적거리던 두 다리는 공중에 떠 있는 듯 달달 떨리기만 했다. 그것도 잠시 뿐, 지팡이를 잡고 있던 포개진 두 손바닥이 저릿하며 아파서 일각수 영감은 순간적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덩치가 없어 땅바닥의 먼지조차 일지 않았다. 평소에 가지 않던 길을 따라 걷는 것은 역시 힘에 버거운 일이라는 게 뼈저리게 느껴졌다. 안 하던 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멀리 와버린 듯한 생각에서 남들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한숨만 푸푸 흘렸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려다가 집어치운 것은 한 달 전이었다. 남들처럼 '품위 있고 행복한 죽음'을 생각하며, 죽을 즈음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서 지켜봐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듯해 철지난 달력 뒷장에 쓰던 글씨를 짓이기듯이 먹칠해버렸다.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딱히 지켜봐 줄 이가 없는 까닭도 버킷리스트를 더 써 내려갈 수 없는 이유였다.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미처 그러한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바는 아니었지만 막상 죽음을 생각하면서 자기 곁을 온전하게 지켜줄 사람 하나 없다는 사실은 새로운 불안감을 부추겼다. 행려병자로 떠돌다가 죽었을 때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신원을 확인하느라 수고로움을 더해 주는 것은 지금까지 지었던 업에 또 다른 하나의 업을 더할 뿐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방안에서 아무도 모르는 새 혼자 죽는다는 것도 서글프기는 매 한가지일 듯했다. 새삼 끔찍한 마음이 들면서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갔다.

"김 영감. 그동안 소원하였소. (중략) 내가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 하오. 아마 한 달 안에 죽을 것이오. 내가 죽을 때 임종을 해달라고는 하지 않으리다. 이 서신을 받고 한 달 후에는 내가 살던 집으로 찾아와서 뒤처리를 부탁하오. 염치없는 부탁인지는 아오나 피붙이 하나 없는 내가 마지막을 부탁할 데는 김 영감뿐이라서 그러는 게라오. 부디 부탁을 하오……."

버킷리스트 작성하기를 포기한 일각수 영감은 김중수 영감에게 편지를 썼다. 친구라 하더라도 다른 영감들은 모두 일각수 영감을 못마땅해하면서 따돌림을 했지만 김중수 영감만은 달랐다. 정곡을 콕콕 찌르는 바른 소리를 해대면서도 그나마 친구대접을 해주었던 까닭에 진심을 담아 편지를 쓴 것이다. 편지를 쓸 때는 답신을 보내오거나 한 번쯤은 방문이라도 해줄 것으로 은근히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이 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다 되도록 김중수 영감으로부터 소식은 감감했다. 그동안 김중수 영감에게 좋지 않은 일이 먼저 일어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메아리 없는 아우성을 괜히 질러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기다리던 기별이 왔다.

"일각수 이 영감탱이야. 이제는 나에게 그런 거짓말까지 하기야. 이 망할 놈의 영감탱이, 하다하다 이제는 뭐, 죽는다고 송장 치워달라는 거짓말을 하기까지야. 이 영감탱이. 다시는 그런 편지고 뭐고 보내지 말아 이 영감탱이야. 죽고 나서야 그 못된 짓을 고치려나. 쯧쯧……."

읍내 유치원에 다니는 이장 집 손자가 일각수 영감 집으로 찾아와서 전화가 와 있다고 기별해주었다. 일각수 영감이 방문을 열고 나서자 깡충깡충 뛰다시피 달아나 버린 이장 집 손자 뒤를 따라가 그 집 방문 앞에 엉거주춤 서서 수화기를 건네 받았다. 일각수 영감이 여보……, 하는 순간 김중수 영감의 가시를 삼킨 듯한 핏발 선 말이 귀가 먹먹하도록 쏟아졌다. 일각수 영감은 단 한 마디도 못한 채 듣고만 있다가 슬그머니 수화기를 이장 집 방문 앞마루에 내려놓고 말없이 돌아섰다. 마음이 아팠다. 김중수 영감이 무람없이 어떤 말 벼락을 내리치더라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그 전화를 받고 나서는 의기소침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오줌을 지리 듯 한 올 한 올 몸에서 빠져나가는 기력이 눈에 보이는 듯도 했다. 일각수 영감은 죽음이 눈앞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진심을 다해 부탁했던 김중수 영감으로부터 호된 야단전화를 받고는 완전히 풀이 죽고 말았다. 김중수 영감이 만날 때마다 하루를 살더라도 제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했던 조언도 생각났다. 뻔한 거짓말을 왜 하냐고 하면서 다그치던 김중수 영감이었다. 거짓부렁이 몸에 밴 일각수 영감으로서는 저도 모르게 하게된 말이라 돌아서면 후회를 하면서도 할 수 없이 반복된 행동을 하곤 했다. 출생의 근본도 모른 채 머슴살이를 하며 나이 든 탓이었다. 열 여덟 살 때 머슴살던 집에서 나와서부터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홀홀 단신 살기 위한 수단으로 갖은 거짓말과 지키지 못할 약속을 밥먹듯이 했다. 순간 순간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궁핍한 처사였지만 금새 들통이 나버리곤 했던 거짓행동이 저도 모르게 이어지면서 만성이 돼버린 탓이다.

일각수 영감은 주저앉았던 자리에서 지팡이에 의지해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썼다. 기력이 떨어져 달달 떨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더 이상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순간 졸리듯 눈이 감기면서 헛것이 보였다. 그 때 무서운 얼굴을 한 어떤 병사들이 각기 칼과 방패, 창을 들고 나타나 그를 둘러쌌다. 일각수 영감은 기겁을 하며 사력을 다해 뒷걸음질을 하려고 했으나 몸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정신을 잃었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주먹보다도 더 큰 쇠뭉치가 열매로 매달려 있는, 칼로 된 나무가 가득한 뜰에 도착해 있는 것을 알아챘다. 몸을 조금만 움직이려고 해도 칼에 베이고 시도 때도 없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쇠뭉치가 정수리를 내리쳐 한 발작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는 그를 감시하고 있는 병사의 말이 더 가관이었다.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8만 번을 나고 죽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그 상황에서 일각수 영감은 기겁을 하면서 죽었다가 살아나고 다시 죽기를 반복했다.

일각수 영감은 다시 쇠뭉치가 정수리로 떨어지려는 찰나 괴성을 지르다가 놀라 간신히 눈을 떴다. 죽음의 문턱에서 지옥의 환영을 체험한 듯 했다. 너무나 생생한 환영에서 깨어난 일각수 영감은 한평생 가즈럽게 굴었던 스스로를 자책하며 그동안 되지도 않은 말로 이리저리 꾸며대고 거짓으로 살아온 삶이 후회됐다. 진실된 말만을 하며 제대로 살아왔더라면 이런 후회는 들지 않았으리라는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인생이 측은해 하염없는 눈물만 쏟아냈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