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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뿌리가 내려질 때

편집부   
입력 : 2012-06-18  | 수정 : 2012-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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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소리에 그동안 목말라하던 초목들이 생기가 돌며 세상이 더욱 푸르러 졌다. 담장을 따라 바람결에 스산대던 대나무도 밤사이에 새롭게 쑥쑥 커 올라 키를 맞춰 담벼락에 기웃거린다. 눈을 들어 사방을 돌아보니 키가 크고 물오른 놈이 그 뿐이 아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눈으로 살펴보면 하늘만 빼고 땅 전체가 그러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더니 이를 두고 그러는가 보다.

"향상(向上)이란 생명의 실상(實相)을 개현(開顯)하는 것이다. 우주를 움직이는 힘과 내 속에 살고 있는 힘이 다른 것이 아니다."(실행론 2-2-4 제4절 깨달음과 향상)

나날이 새롭고 점차로 나아진다는 것은 모든 생명들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무한한 우주법계에 두루 미치는 다양한 생명의 활동에너지는 삼라만상에게만 적용될 뿐 아니라 내속에 나를 살리는 에너지원(Energy Resources)이기도 한 것이다. 

아침부터 우리나라가 세계 7번째로 20-50클럽에 오른 국가가 되었다고 톱기사로 나왔다. 6월 23일자로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 이르고 인구가 5천만 명이 넘어 선다고도 한다. 우리 국민에게는 다소 어려운 지표였던 현실이 눈앞의 일이 되고 보니 호주나 캐나다가 부럽지 않은 형국이다. 이제 비로소 선진국에 진입되고 인구강국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호국보훈의 달인 6월 들어 옷깃을 여미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할 때이다. 선공후사라 하였듯이 항상 공을 앞세우고 사리사욕은 뒤로 미루어 할 일이다.

현실에는 아직도 바다거나 하늘이거나 육지거나 남북이 호시탐탐 대치하고 있고 나라의 젊은이들이 의무로써 일선을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민족의 숙원사업은 뭐니뭐니 해도 자주평화통일이다. 오늘날의 나라를 지키는 일은 총과 칼이 아니더라도 건강하고 올바른 사상과 국가관이야말로 제일의 무장이 된다. 또 한편으로 국가와 사회성장의 다른 면에서는 가슴이 저리고 아픈 현상도 있다.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청소년의 탈선, 폭력과 왕따문화로 인하여 꽃도 피워보지 못한 나이에 세상의 인연을 등지는 모습이라든지, 거칠고 무절제한 술 권하는 사회의 모습에는 조금 더 인고(忍苦)하고 자제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나는 어릴 때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잦았다. 온갖 병으로 약도 소용이 없는 나에게 외조부께서 좀 더 견뎌내라고, 삶의 뿌리를 내릴 때까지 살아달라는 의미를 담아 세기(世基)라고 자(字)를 지어 주셨다. 그래서 어릴 때의 기억이라고는 늘 배가 아프든지 머리가 아프든지 온몸에 열이 나든지 기침이 심하든지 하여 혼자서 지내는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깨쳐보면 전생에 경구죄(輕垢罪)나 살생의 업으로 단명다병의 지은 허물을 인연한 때문에 그러한 고통 속에서 지내게 된 것이다. 인과를 깨치므로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더 건강하고 은혜로움이 깊어지는 이유가 되고 있다. 인생에 있어서 누구나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 어떠한 작은 도움의 손길이 있어서 그 순간을 이겨내고 시간이 지나보면 고마운 마음 때문에 두고두고 되새기게 된다. 그리고 그 따뜻한 손길의 인연으로 이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무수히 많은 인연을 만나게 되는 시작이 된다.

그때마다 그것이 빚 갚을 기회로 다가오는 것임을 알게 된다. 복이 없다고 자각하는 순간이 어쩌면 가장 행복한 때인지 모른다. 겸허한 가운데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잘 살피게 되고 세상의 경외스런 삶들을 이해하며 살아가게 되는 데 지족한 생활이 되는 것이다. 지나보면 그 모두가 법다운 것이 아님이 없으므로 반드시 깨쳐보아야 한다. 조심스럽게 음식을 꼭꼭 씹어 먹는 버릇도 그 때문에 생긴 것이다. 항상 부족하지만 살아가면서 깨달아야 되고 늦기 전에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제 다행히도 진리를 만나고 지비용의 생활이 되어 삶의 싹이 뿌리를 내리게 될 즈음엔 은혜로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동안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이 버팀목이 되어 이 어려운 고개를 넘어서고 여유를 부리게 된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집안 어른의 바람대로 건강하게 살아가게 된 이유에서 나 또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어디선가 아파하고 힘들어하며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생활을 하며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것이 필연이며 천직이라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살아가는 모든 생명과 모든 인연을 사랑하자. 그리고 자신을 충분히 이해하고 용서를 하자. 그렇게 삶의 뿌리를 내릴 때 하나가 되는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지정 정사·종조법어연구모임 연구위원·불승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