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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馬]의 정면으로 가서 문제를 응시하자

편집부   
입력 : 2012-06-15  | 수정 : 201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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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도 치우치지 않고 저곳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중도(中道)라고 한다. 중도를 유지하려 하기 위해서는 양쪽을 모두 두드려 보는(叩其兩端)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양극단을 두드려 보기보다는 한쪽으로 치우쳐 살아가기가 일쑤다. 그것은 번거롭게 양쪽을 다 생각하기보다는 한쪽을 생각하는 것이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 속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백호(白湖) 임제가 잔칫집에서 거나하게 취하여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나와 말을 타려고 하자 하인이 “나리! 취하셨네요. 가죽신과 나막신을 한 짝씩 신으시다니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백호가 하인에게 “길 오른편에서 나를 보는 사람은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길 왼편에서 나를 보는 사람은 나막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어쩌면 나도 말의 한쪽 면으로 다가가 한쪽만을 바라보고 건너편에 있는 발에도 똑같은 신발을 신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는 그런 사람은 아닌지를 생각해 보았다.

연암은 이글 ‘낭환집서’ 말미에서 “오직 답을 변별할 수 있는 것은 ‘청허(聽虛)’ 선생뿐이라고” 말한다. 곧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텅 빈 것을 들을 수 있는 사람.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열린 마음으로 말의 정면으로 가는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말의 정면에 가야 양발이 보이고, 열려있는 마음이라야 모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너무나 분명한 짝짝이 신발도 구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밖에 없다.

‘낭환집서’에 나오는 짝짝이 신발 이야기는 자신이 본 반쪽의 기준을 가지고 전체를 재단하면서 본질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내리치는 죽비와 다름 아니다.

신상구 / 위덕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