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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제577호)

편집부   
입력 : 2012-03-30  | 수정 : 2012-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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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보전, 이제 연기론적 관점으로 볼 때이다


곧 식목일(植木日)이 다가온다. 나무를 심고 아끼고 잘 가꾸도록 권장하기 위하여 제정된 날이다. 1872년 4월 미국 네브래스카주에서 제1회 식목행사가 열렸으며, 그 후 식목운동을 주창한 J. S. 모턴의 생일 3월 22일을 나무의 날[Arbor Day]로 정한 것이 식목일의 시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4월 5일을 식목일로 정하고 있는데, 신라 문무왕 때인 677년, 당의 세력을 몰아낸 날인 음력 2월 25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라 한다.

나무의 고유 기능은 잎, 줄기, 뿌리에 물을 담아 홍수와 가뭄을 막고,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잡아 가두고, 산소를 내뿜는 기능이다. 특히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교토의정서 발효로 숲은 그 자체로 이산화탄소 배출권을 좌우하는 국민경제적 가치가 된다. 이처럼 나무심기와 가꾸기는 이제 환경보호라는 중차대한 효과와 함께 경제적 효과까지 창출해 낸다. 인간에 대한 산림의 가치는 금전적으로 계량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전 세계에 걸쳐 자행되고 있는 숲의 파괴를 볼 때마다 장자(莊子)가 '물고기가 강과 호수 덕분에 살고 있음을 잊어버림[魚相忘乎江湖]'을 지적한 바처럼, 우리 인간들이 나무와 숲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있지 않은 지 염려된다. 인간의 작은 욕심 때문에 없어지고 파헤쳐지는 것이 어디 숲뿐이겠는가.

많은 이들이 환경의 파괴에 대해 걱정하고 대안 세우기에 힘을 쏟고 있다. 환경의 파괴가 우리 인간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을 익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경보전을 생태학적 관점에서만 보려하는 것은 또 다른 환경파괴를 초래할 수 있다. 생태학(ecology)이란 자연생태에 관한 철저한 객관적 관찰학으로서 유물론의 하나이다. 이제 생명학으로서 접근해야 할 때이다. 생명학이란 생태학의 객관적 관찰체계와 그 생태물질 내면에 숨은 차원으로 존재하는 '마음'과의 여러 상관관계에 대한 학문적 접근으로서 다분히 불교적이다. 생태계의 본질인 '상호의존성'까지 생각하자는 뜻, 뭇 생태계의 인연을 중요하게 생각하자는 뜻이다. 연기(緣起)하는 존재가 '중생' 즉 '중연화합생기(衆緣和合生起)'가 아닌가.

인연을 고려치 않고 오로지 나무심기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참나무 숲이 수백 년을 이어가며 잘 자라던 솔숲을 밀어낸다는 보고도 있다. 쓸모 없는 외래종 식물이 토종 수목을 해친다는 보고도 있다. 마구잡이식 야생동물과 물고기의 방사로 먹이사슬의 생태계가 혼란에 빠지고 있다고도 한다. 생태물질 내면의 숨은 차원인 이 '마음' 즉 '연기'를 고려하지 않은 탓이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은 환경보전의 중요성을 우리보다 일찍 터득했다. 그리하여 개발로 피폐해진 환경을 되살리려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대체로 실패했다. 한 번 훼손된 환경을 되살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실패의 까닭이 생태학적인 환경회복정책에만 매달린 탓이었다는 그들의 슬픈 고백을 우리는 간과해서 안 된다. 그들이 늦게나마 생태물질 내면의 숨은 차원인, 불교에서 말하는 바로 그 '마음'이란 기능이야말로 환경을 보전하고 되살리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인식하게 되었음을 우리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수질(水質)이 건강하고, 수초(水草)도 건강한 강에서 물고기가 살아갈 수 있다. 기생식물이 숲을 덮어 탄소동화작용을 막으면 숲은 위험해진다. 역피라미드형의 먹이사슬도(圖)는 동물생태계는 물론 식물생태계까지 교란시킨다. 세상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들은 단순한 물질구조로만 되어 있지 않으며,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생태계의 본질은 연기(緣起)로서, 환경보전에 '연기론'이 도입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