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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제575호)

편집부   
입력 : 2012-02-29  | 수정 : 2012-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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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성(自主性)은 곧 보리심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삼일절이 올해로 제93주년을 맞이하였다. 잘 아는 바처럼 삼일운동은 고종 황제 독살 소문으로 촉발되어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미국의 월슨 대통령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주창한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결주의가 기폭제가 되어 일어난 대규모의 민족적 궐기였다. 비록 삼일운동이 독립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일제에 대한 우리 민족의 자주 의지를 분명하게 표현한 거사였다. 역사가 보여주듯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민족의 자주성에 달려 있다. 민족이 자주성을 잃으면, 그 민족은 곧 멸한다. 외부의 침략만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는 인간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주성을 가져야만 사람이 바로설 수 있다.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본능적인 욕망을 자제할 수 있고, 가진 것을 서로 나눌 수 있고, 공존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것이 여타 동물들과 다른 고귀한 사람의 가치이다. 그 가치는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본심이지만, 기르지 않으면 쉽게 진에에 파묻히는 속성이 있다. 가지고는 있지만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세상이 팍팍해지고 경쟁으로만 치닫는 이유 또한 그 본심이 드러나지 않는 까닭이다.

종조 회당 대종사님께서 "종교란 일상생활에 자주성을 기르는 것"이라고 하신 바 있다. 즉 사람 사는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종교란 뜻이다. 그렇다면 삶의 궁극적 해결점이 '자주성을 길러내는 데' 있다면, 과연 그 자주성이란 무엇인가? 자주성이란 곧 사람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스스로 주인이 되는 성능이다. 즉 사람은 누구나 자주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 자주성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고 실현하는 것이 궁극적인 삶의 가치라는 뜻이 말씀에 오롯이 들어있다. 

우리 불교에서는 인간의 본 마음을 보리심(菩提心)이라 한다. 진에에 덮인 마음이 아닌 태어날 때의 바로 그 청정한 마음이다. 법계에 두루 차 있는 보리성(菩提性)은 각 개체에 미치어 보리심이 되고, 개체에 내재되어 있는 보리심을 널리 세상에 드러냄이 발보리심(發菩提心)이다. 대종사님의 말씀을 분석하면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이 발보리심으로 사는 것이요, 법계와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보리심을 찾아내어 발휘하는 것이 곧 '자주성'을 기르는 삶이란 뜻이다.

세계는 이제 하나의 공동체이다. 민족이란 개념보다 나라, 나라의 개념에서 지구촌이라는 거대한 동일체의 개념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리스의 디폴트(채무불이행)가 연쇄적으로 전 세계에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을 만큼 점점 지구촌은 동일체가 되어가고 있다. 한 나라가 아무리 건전한 재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 엉뚱한 일이 해가 되어 돌아오는 시대가 되었다. 민족적 자주성도 지키고 길러야 할 중요한 덕목이지만, 개인의 본심인 보리심을 길러야 할 때가 왔다. 각 개인의 보리심이 적극적으로 발휘되어야만, 세상을 포용하고 섭수할 수 있는 자타일여(自他一如)의 삶을 꾸릴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