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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제573호)

편집부   
입력 : 2012-01-31  | 수정 : 201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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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사입정(斥邪立正) 그리고 공분(公憤)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뽑은 새해 희망의 사자성어는 '파사현정(破邪顯正)', 직장인들이 뽑은 사자성어로는 '마고소양(麻姑搔痒)'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파사현정'은 그릇된 것을 깨뜨려 없애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생각을 버리고 올바른 도리를 따른다는 뜻이 그 어원이다. 회당 종조님께서도 '실행론'에서 자신과 사회를 바로 세우려면 사(邪)는 물리치고 바른 것을 세우고, 사심(邪心)은 물리치고 정심(正心)을 세우며, 사도(邪道)는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세우는 '척사입정(斥邪立正)'을 유독 강조하신 바 있다. '마고소양'이란 마고라는 손톱이 긴 선녀가 가려운 곳을 긁어 준다는 말로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 두 사자성어가 희망어로 선택된 것은 지난해 우리 사회가 바르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점이 많았으며, 뜻대로 되는 일 또한 많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이제야말로 모든 국민들이 힘을 합쳐 정치와 경제, 사회와 교육 등 망가진 우리 사회를 바로잡을 때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불교에서는 화가 자신과 이웃을 공멸케 하는 근본임을 알고 화를 다스리라고 한다. 개인적인 화는 내가 다치는 것이 두려워서 나타내는 심리의 발로이다. '나[我]'가 단단한 사람일수록 화를 쉽게 낸다. 독립된 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미숙한 병이 화이다. 화로는 결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화로 사람을 움직이려 하는 것은 하책(下策)이다. 불자(佛子)들이라면 누구나 인지하고 따르는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는 화를 낼 때가 되었다. 사적(私的)인 분노가 아니다. 자신과 주위를 급격하게 상하게 하는 감정이 바로 분노이다. 그러나 이를 공의(公義)로 승화시키면 분노란 사회를 바꾸는 중요한 에너지가 된다. 공분(公憤)이 바로 그러하다. 삿된 것에 대한, 인권탄압에 대한, 불평등과 부정·비리에 대한 공의의 분노가 공분이다. 비록 외세의 도움이 있었지만, 일제의 약탈과 핍박에 분노하고 저항하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이 과연 독립국가다운 국가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독재 권력에 분노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을까? 인권침해, 불의(不義)와 악(惡)에는 단호하게 공분(公憤)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뿐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튀니지부터 시작되어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를 강타한 재스민혁명. 미국의 구조적 불평등과 대형 금융사들의 탐욕에 분노한 월가점령시위(Occupy wall street) 등도 모두 공분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불이(不二), 이고득락(離苦得樂), 자비(慈悲) 이 세 가지 개념이 우리 불자(佛子)들이 공분해야 하는 이유를 뒷받침한다. 자신은 물론 타인 또는 모든 존재의 안녕과 질서가 함께 실현하는 것은 불이라면, 모든 존재의 안녕은 곧 자기 보존과 동시에 이고득락의 실현 과정이며, 이는 자신은 물론 타인의 존재에 대한 보살핌[자비]에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불교의 핵심이 상호의존성 인식과 이에 근거한 자비의 실천에 있다. 그리고 자비와 보살핌, 협동 같은 품성은 보편적 책임의 실천이요, 인류의 진정한 발전은 이러한 품성을 필요로 한다. 자유, 평등, 존엄에 대한 갈망이 인간의 선천적 본능이라는 것이 우리 불교의 인간에 대한 입장이다. 인류의 소중한 이념인 상호의존성[不二·離苦得樂·慈悲]을 훼손하는 거짓과 탐욕, 불의와 부정이 판치는 세상에 공분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만 홀로 척사입정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제도와 사회의 잘못에 분연히 맞서는 것이 진정한 불자의 도리이다. 맞섬은 폭력적인 힘이 아니다. 불의와 맞설 수 있는 평화적 방법은 많다. 그 중 하나가 선거권이다. 

마침 올해는 총선과 대선이 함께 실시되는 해로서 망가진 사회를 다잡을 기회이기도 하다. 폭력적 저항 없이도 이 사회를 척사입정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