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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제570호)

편집부   
입력 : 2011-12-06  | 수정 : 201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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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날치기 통과를 보면서
      -박제된 개인의 양심과 다수의 횡포

지난 11월 29일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 FTA 이행법안에 서명했다. 이로써 지난달 22일 국회 본회의 날치기로 통과된 한미 FTA의 모든 비준절차가 마무리되었다.

한미자유뮤역협정은 침체된 자국 경제를 살리기 위한 미국의 강력한 압박에 의한 것으로 약소국인 우리나라가 전면적으로 반대하기 어려운 점은 있다. 그래서 서민을 위한다던 참여정부도 한미 FTA를 체결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협정이 당당한 주권국가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일방적인 미국의 압력에 국내 시장을 고스란히 내어 주고 말았다는 점이다. 미래에 생겨날 새로운 서비스분야조차 무조건 개방해야 한다는 이른바 네거티브 리스트와 한번 체결하면 후퇴와 완화가 불가능한 레칫조항, 한국이 다른 나라와의 협정에서 개방한 만큼 미국에도 추가로 개방해 주어야 한다는 미래 최혜국 조항, 투자자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할 수 있도록 한 투자자-국가제소권(ISD) 조항 등은 과연 국가 대 국가 간의 정당한 계약이냐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오죽하면 미국의 양심적인 정치인, 경제전문가들조차 “한국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협정이므로 재협상해야 한다”고 했겠는가. 심지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경제학자 스타글리치 교수는 “한국에 미국식 경제는 맞지 않으며 오히려 스웨덴식 경제를 선택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런데도 정부와 여당은 충분한 국민적 합의 없이 물리적 힘으로 국회통과를 이루어 내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충실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다수를 내세워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소수를 설득하고, 소수와의 타협을 통한 조화를 이끌어 내는 게 진정한 민주주의 정신이다. 민주주의 정신은 다수결의 원칙에 있다는 말은 잘못되었다. 진정한 민주주의 정신은 절차와 과정에 있다. 아무리 옳다고 생각해도 절차와 과정, 방법상에 하자가 있다면 어찌 민주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정부와 여당은 왜 미국식 경제제도를 도입하면서도 미국식 민주주의는 보지 못하는가? 언제 미국 의회에서 이런 식의 폭거를 일삼았단 말인가?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일수도 있는 중대한 기로에서 소수의 야당의원들조차 설득하지 못하는 정부와 여당은 스스로 무능력을 입증하고 말았다.

더욱 한심한 것은 한미 FTA 협정에 반대하고 나선 여당의원이 단 한 사람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당론이 중요하다지만 개개인의 양심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집단이라면 일국의 정당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하다. 일사불란한 행동통일은 파쇼집단이나 하는 짓이다. 그러려면 당 대표 한 사람이면 족하지 수많은 국회의원은 왜 필요한가.

그나마 한나라당 11명의 의원이 기권을 표시하고 16명의 의원이 불참함으로써 소극적 반대의사를 표명하긴 했지만 반대표가 단 한 표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이 나라의 암담한 정치현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본다. 그 단 한 표의 반대표에서 우리는 절망과 함께 희망도 본다. 집단 속에서 개인의 양심이 무한대로 자유롭기는 어렵다. 자칫 자신의 정치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론보다는 자신의 양심과 지역민(강원도 홍천군, 횡성군)의 뜻에 따른 황영철 의원의 용기는 박수를 받을 만하다. 지금은 당에서 ‘왕따’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그가 보여준 용기라면 그 ‘집단 왕따’마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한미 FTA의 유, 불리는 둘째 문제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타협하고 조정하는 절차와 과정에서의 정당함을 잃어버린 다수당의 횡포를 보면서, 그리고 집단적 강요 속에서도 의연히 양심과 지역민의 뜻을 선택한, 외롭지만 의로운 단 한 표의 반대표를 보면서 대한민국의 정치에 기대와 희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