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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하는 생활

편집부   
입력 : 2011-10-17  | 수정 : 201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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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의 화두(話頭)는 "내 허물이 무엇일까?"이다.' 라고 하였듯이 진각종단은 참회의 종단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초기 교단 명칭을 보아도 '참회원'이었던 만큼 종단의 정체성이나 회당 대종사님의 정신도 참회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참회를 빼고 지나칠 수가 없다. 종조님의 법명도 '회당(悔堂)' 즉 '참회의 집'이란 뜻이다.

보통 그 사람이 거처하는 집을 중심으로 혹은 글방이나 사랑채에서 이름을 따서 '당호'를 짓는다. 또 불교에서는 도를 잘 닦은 승(僧)에게 지어주는 별호로써 당호를 쓰기도 하나 법명으로서 '회당'이라는 호칭을 쓰셨다는 것은 그만큼 참회 정신을 중요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모든 종교의 출발점은 공통적으로 참회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소 표현 방식은 다르더라도 그 공통점은 역시 참회이다. 참회는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은 아니다. 지난날의 잘못이나 허물을 돌이켜서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서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고 시행착오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중생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실수를 할 수 있으며 죄를 짓기 마련이다.

그랬을 때 곧 그것을 드러내어 참회하여야 한다. 참회할 줄 모른다는 것은 바로 축생과 다를 바가 없다. 축생들은 잘 못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축생과 다른 점은 바로 자신의 잘 못을 안다는 것일 것이다.
참회는 내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 정화 되어 갈 수 있고 끝없이 새로 태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뱀이나 누에가 자신의 허물을 벗음으로써 더 자랄 수가 있듯이 잘못된 내 허물이나 부정적인 부분을 보고 고쳐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미래를 새롭게 할 수 있으며 자신의 발전과 인격이 완성되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잘 못이나 부족한 부분을 감추려고 한다. 그래서 그 잘 못을 감추기 위해서 그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다. 잘못을 남에게 돌리면 자기의 허물이 감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의 허물을 들춰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의 허물을 보는 원인이 된다. 우리 사회에는 가끔 자신의 죄를 감추려 하다가 더 큰 화를 자초하기도 하고 더 큰문 앞에서 좌초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래서 ‘범한 뒤에는 곧 부끄러움을 참회’할 수 있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즉 ‘건전한 용맹으로서 청정함을 얻은 자’가 되지 못하고 만다.

참회의 뜻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앞에 와서 손발이 닳도록 비는 것이 참회가 아니라 어떤 잘 못을 했을 때 '내 탓'으로 돌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내 탓으로 돌릴 줄 아는 사람은 잘못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종조님께서도 '불교는 예배하는 곳이 아니라 깨달음에 있는 것이며, 교리자체가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으로 참회와 실천이 중심인 종교' 라고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겨 보고자 한다.

효원 정사/종조법어연구모임 연구위원·범석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