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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제566호)

편집부   
입력 : 2011-09-26  | 수정 : 201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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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共存)이 고유(固有)함을 말살하지 않는다

9월 12일은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이었다. 음력으로는 8월 15일이다. 우리 민족은 크게 양력(陽曆·solar calendar)과 음력(陰曆·lunisolar calendar) 두 종류의 역법(曆法)을 쓰고 있다. 국제정세에 따라 대한제국 원년인 건양원년 1월 1일을 기해 양력이 도입된 이래 지금까지 공식적으로는 양력이 사용되지만, 민간에서는 양력과 함께 음력이 꾸준하게 사용되어 왔다. 양력은 B.C 18세기경 태양의 운행을 기준으로 만든 역법으로 고대 이집트에서 1년 365일의 태양력을 만든 것이 그 기원이며,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을 거치며 보완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음력은 달[月]의 모양이 변하는 주기를 활용한 역법으로,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은 윤달을 전혀 두지 않는 순태음력(純太陰曆)이 아니라, 태양력에 따라 윤달을 두는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이다. 신라 때의 인덕력(麟德曆), 백제 때의 원가력(元嘉曆), 고려 때의 선명력(宣明曆)과 대통력(大統曆),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음력인 조선 때의 시헌력(時憲曆)이 모두 태양력이 바탕이 된 태음태양력이다.

진각종단에서는 창종 당시부터 양력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법신불은 태양 같고, 화신불은 만월(滿月)같다/그러므로 법신 명호(名號) 비로자나 대일(大日)이라/밀교 본신(本身) 양(陽)인 고로 현세정화 위주하며/밀교 본신 양(陽)을 쓰고 일요 자성 날을 한다"는 종조 회당 대종사의 말씀에 근거한다. 양력 사용은 생활불교를 강조한 대종사의 시대적 판단과 민족공존 의식의 발로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현재 진각종단의 8대 기념일이 양력과 음력으로 혼재되어 일관성과 보편성이 없다는 점이다. 즉 종단기념일인 종조탄생절·종조대각절·종조열반절·창교절은 양력으로 시행하며, 현교의 기념일 가운데 부처님오신날은 음력으로(창종 초기부터 양력으로 시행해 오다가 국가의 기념일로 제정된 후에 음력으로 전환했지만), 우란분절(해탈절)·성도절·부처님열반절은 양력으로 시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민족 고유명절인 설날은 양력으로 하는 반면, 추석은 음력을 사용한다. 그런데 양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정부에서도 민속명절인 설날(음력 1월 1일)과 새해(양력 1월 1일)를 민속기념일과 국경일로 구분하여 지정하고 있다. 게다가 새해가 단 하루 휴무일인데 비해, 고유명절인 설날은 3일간 연휴를 주어 그 가치를 더 크게 두고 있다. 들어내 놓고 표현하지 않지만 신교도들의 불편이 많은 건 사실이다.

불교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늘 관용과 포용으로 해당 자연환경과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며 공존해 왔다. 심지어 민중에게 해악이 되지 않는 한, 불교와 무관한 토속신앙까지 수용해 왔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옛것만을 고집하지 않고, 부처님의 법을 유연하게 해석해 오기도 했다. 이 자세가 곧 민중에 대해 불교가 가진 공존(共存)의 자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불교의 고유(固有)한 법(法)이 훼손된 일은 없다.

진각종단 역시 공존의 자세로 종교와 민속을 구분할 때가 되었다. 신교도들에게 더 이상 불편을 주어서는 곤란하다. 현실적으로 신교도들은 이중과세를 하고 있는 셈이다. 온 집안이 다 진언행자라면 상관없겠지만, 양력설만 고집했다가는 이웃종교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처럼 눈총을 받을 수도 있다. 본지 기사로도 알 수 있듯이, 몇몇 심인당에서는 동짓날 서로 팥죽을 나누고, 단오날 윷놀이를 하는 등 종단에서도 고유명절을 음력으로 기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을 중시하시는 종조님이 계신다면, 이미 양력과 음력의 기념일을 구분하여 정리하셨을 지도 모른다.

차제에 이 문제를 교법차원에서 공론화 하여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하기를 바란다. 진각종단의 기념일과 국경일은 양력(법신불은 태양 같고)으로, 현교 기념일과 고유명절인 설날·추석·단오·동지 등은 모두 음력(화신불은 만월 같다)으로 정리하여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종조님의 사상과 고유의 전통을 훼손하자는 제안이 아니다. 공존하면서 고유함을 지켜나가자는 제안이다. 공존이 결코 고유를 말살하지 않는다. 공존하면서 고유함을 면면히 유지해온 것이 불교의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