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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수'의 오류

편집부   
입력 : 2011-08-12  | 수정 : 2011-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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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찌뿌드드한 몸살을 앓고 있다. 공중파도, 케이블 TV도 '슈퍼스타K', '위대한 탄생', '불후의 명곡' 같은 노래 경연 프로그램을 무분별하게 쏟아낸다. 그 중심에 MBC '우리들의 일밤-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가 자리한다. '나가수'는 물량 규모, 영향력, 무대 외적인 논란, 화제의 폭발성에서 동종 유사 프로그램을 압도한다.

'나가수'는 시청률 확보를 위한 방송사의 전략과 기획의도를 논외로 한다면, 훼손된 대중음악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도 일단 평가할 수 있다. 꽃미남 아이돌이나 섹시코드를 기본으로 장착한 걸그룹의 립싱크 퍼포먼스에 실증이 난 시청자에게 '노래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콘셉트로 진정성과 다양성을 내세워 접근한 것은 나름 신선한 발상이었다. 또한 정상급 가수들의 경연과 열창은 그 자체로서 일반 대중들에게는 음악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준 카타르시스적 요소도 있었다.

'나가수'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나가수'를 '나가수'이게 한 존재 이유가 위협받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나가수' 또한 가요의 흐름을 오도하는 권력이 되고 만 것이다. 가수들은 살아남기 위해 가창력을 중시한다. 그러다 보니 '내지르고 울부짖는 창법'만이 음악의 본질이요, 요체인 것처럼 오해와 혼란을 주게 되었다. 너도나도 자기의 본령과 정체성을 버린 채 '더 크게, 더 멀리, 더 강하게' 내지르는 창법을 모방하기에 이르렀다. 대중가요가 일반대중과 소통하는 데에는 여러 경로가 있다.

음악적 표현의 다른 갈래로 부드럽고 촉촉한 감성, 절제된 곡 해석, 섬세하고 서정적인 화음, 목소리 자체의 오묘함도 나름 중요한 매력 포인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나가수'에서는 내질러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 너도나도 이를 따라한다. '나가수'는 본디 노래의 다양한 표현방법을 소개하고자 했으나 가창력이 절대적인 것처럼 잘못 인식돼 다양성을 저해하고 이로써 '나가수' 존립의 의미가 오히려 퇴색되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노래의 본질에 다가서고 다양성을 부여하기 위한 애초의 의도는 좋았으나 추구하였던 가치의 덫에 걸려 삐거덕거리는 '나가수' 현상은 '오류를 교정하기 위해 같은 오류를 범하는' 자기모순을 떠올리게 한다.

'나가수'의 또 다른 문제점은 '나가수'가 우리 사회 전반에 과도한 경쟁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연륜이 깊은 기성 가수들이 무대에서 긴장하고 일희일비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상대방의 퍼포먼스에 감탄과 찬사를 보낸다(서로 추어주는 모양새지만 진정성이 와 닿지 않는다!). 프로그램의 오락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희생과 봉사와 협동의 드라마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매회 치열하다 못해 피 말리는 경쟁의 현장을 축제인양 보여줌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팽배한 경쟁심리를 일반대중의 뇌리에 화인(火印)처럼 각인시킨다는 것이 문제다. "어떻게든,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전력을 집중해 살아남아라!"라고 외치는 요란한 티저광고는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단축공정과 개발독재의 후유증으로 공공선(公共善)과 인간정신의 고양(高揚)보다 세속적인 영달과 부의 축적을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만연돼 있다. 치열한 경쟁의 와중에서 반목과 갈등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덕목은 대결과 결사항전의 의지가 아니다. 그런데 '나가수'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성공한 이들 간의 더 나은 성취와 도약을 위한 치열한 대결의 현장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평범한 이들이 희망을 갖고 경쟁할 수 있는 소박하고 정정당당한 꿈의 장(場)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질서의 존중과 표준의 확립, 이웃과의 공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중요하다. 초기의 '김건모 재도전 파문'도 주최측에서 편법을 사용해 구차스럽게 봉합하려다 저항에 부딪쳐 일을 그르친 것이 아니었던가.

김창식/수필가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