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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제558호)

편집부   
입력 : 2011-05-13  | 수정 : 2011-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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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조님이 오신 뜻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음을 통해 불교 세계를 여신 것처럼, 종조님께서도 깨달음을 통해 진각밀교의 문을 여시었다. 석존께서 고행과 명상을 통해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신 것처럼, 종조님께서는 육자진언의 수행을 통해 크나큰 진리를 성취하셨다. 종조님께서는 생활에 바탕을 둔 불교, 기복적이고 의타적이 아닌 실천적이며 각성적인 불교를 통해 대중들에게 희망을 제시하고자 5월 10일 우리에게로 오셨다.

재세 시 종조님께서는 참회와 보은을 유독 강조하셨다. 깨달은 직후 대중들을 향해 일갈하신 법문의 요체 역시 참회정신이었다. 육자진언 염송을 통해 금생에 지은 자신의 허물들은 물론 무시광대 겁으로부터 지은 업보까지 다 드러내어 참회하라는 뜻이었다. 더 적극적으로 상대자의 허물까지 내 허물로 여기어 참회하라고 하셨다. 사람간의 관계란 어차피 서로 인과 연에 의해 맺어져 있다. 상대자의 저 허물이 나로 인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상대의 허물만 탓하는 사회는 서로 수원만 일으킬 뿐이다. '수원은 일시라도 두지 말라'고 하심은, 수원으로 얼룩진 세상은 결국 고해임을 일깨우시는 말씀이다.

참된 참회는 보은심을 일으킨다. 이 세상 모든 인연 있는 것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진정한 보은심이다. 참다운 참회가 이루어지면, 드러나지 않은 연에 대해서도 보은하는 마음이 생긴다. 결코 내가 지은 인만으로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나의 작은 행복은 알게 모르게 보태어진 누군가에 의한 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같은 마음이 '은혜는 평생으로 잊지 말라'는 종조님의 뜻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올바른 참회에 이어지는 보은심인 것이다.

그러나 보은하는 마음만으로 그쳐서는 곤란하다. 그 마음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실천행이 이어져야만 빛을 발한다. 적어도 종조님의 가르침을 받은 진언행자들이라면 더더욱 보은의 실천에 주저해서는 안 된다.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우리 주위의 불행한 이웃들, 그들 역시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끼친 연이 있다. 그들의 불행에 우리가 어떤 의미로든 연을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을 위한 보은의 실천이 그래서 가치가 있고 중요한 것이다. '종교는 실천에 있으며 앎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참다운 믿음이 일어난다'고 하신 종조님의 말씀은 바로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무릇 성인들의 탄생에는 그 뜻이 있다. 그러나 성인 탄생의 의의는 그 분들의 탄생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종조탄생절을 맞아 우리 진언행자들은 종조 탄생의 의미에 앞서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신 뜻과 그 분의 가르침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한다. 그것이 종조님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바라시고 기쁘게 여기실 일이며, 우리가 그 분에게 보은하는 길이기도 하다.

내 허물을 바로 알고 반성하는 참회와 참회에 따른 보은하는 마음, 그리고 보은을 실천하자. 그런 후 우리 함께 종조님의 오심을 마음껏 축복하고 찬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