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그리고 불교(44)

편집부   
입력 : 2010-06-16  | 수정 : 201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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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진리인식과 불교인식논리학

"진정한 의미의 인식은 깨달음의 인식"

불교에서 인식론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지각적 인식과 증오적 인식이다. 지각적 인식은 부처님께서 연기적인 관점에서 설하고 있는 그 인식이다. 잡아함경 13권 36경에 의하면 감각기관과 인식대상과 알음알이의 세 가지가 화합하여야 비로소 감촉, 즉 감각적 인식작용이 성립된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감각기관과 인식대상과 알음알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이라도 결하게 되면 인식작용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인식은 깨달음의 인식, 즉 증오적 인식을 말한다. 이것은 인식이라 부르지 않으며 지(智), 혜(慧), 명(明) 혹은 지혜라 한다. 증오적 인식은 실천에 의해 증득된 것, 즉 마음으로 체증한 실증적 인식이다. 증오적 인식의 인식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주 인생의 이면에 흐르고 있는 진리로, 석존은 법(Dharma)이라 하였다. 먼저 법이란 자기 한 마음의 한 단면인 망심이 곧 그것이며, 동시에 그 망심의 본질이 본래는 정정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양면성을 가진 한 마음 법이 곧 석가의 깨달음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 법이라는 것은 양면성을 지닌 한 마음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드러낸 교법으로서의 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은 연기의 이치, 3법인의 이치, 4제의 이치 등의 법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법은 여래가 출세하거나 출세하지 않거나 법성으로서 법계에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는 것이다. 여래는 다만 이 진리를 먼저 깨쳐서 모든 중생을 위해 분별하고 널리 설할 뿐이다. 이와 같은 의미의 인식이란 지각적으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곧 예지로써 인식하는 것, 증오적 인식의 의의로서 오직 성자만이 가능한 것이다.

초기경론에서 보여주는 논리학에 대한 불교도의 입장은 외도의 학문으로서, 세속의 학문으로서, 논쟁이나 궤변의 한 부분으로서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것이 대승의 유가논서인 유가사지론에 와서는 논리학을 인명(因明)이라는 이름으로 불교 내에 편입시키며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인명은 보살이 마땅히 배워야 할 학문으로서 외도의 논리학을 악언설(惡言說)로써 물리치고 외도의 이론을 굴복시켜 불교의 진실한 성교(聖敎)에 맑은 믿음을 생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당시 인도는 각 학파의 철학사상이 정립되어 학파간에 논쟁이 점차 무르익어 감에 따라 자기 학파의 교리를 옹호하기 위한 논리학의 필요성이 절실해져가고 있었다. 불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논리학을 불교 내에 편입시키기는 하였지만, 아직은 외도의 논리학을 차용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본격적으로 불교논리학으로서 성립하게된 것은 진나(Dignaga·450∼520년경)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법칭(Dharmakirti·600∼660)은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진나는, 그의 스승인 세친 이전에는 바른 인식수단으로 현량(現量), 비량(比量), 성교량(聖敎量)의 세 가지였던 것을 수정하여 현량과 비량의 두 가지만을 바른 인식수단으로 인정하였고, 그 근거를 인식대상에서 구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식대상에는 찰나생멸하는 실재로서의 자상(自相)과 주관적 개념작용[분별]에 의해 구성된 실재가 아닌 공상(共相)의 두 가지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상에 대해서는 현량, 공상에 대해서는 비량만이 바른 인식수단이라고 하였다. 법칭은 진나의 인식논리학을 이어받아 외도와의 논쟁을 통해 부족한 부분들을 보충하였다. 이 가운데 현량은  분별을 배제하며 착각이 아닌 것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분별을 배제한다'는 것은 구성과 무관한 것으로 반성이라는 본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언어표현과 결합이 가능한 마음에 나타나는 어떠한 것도 배제한다는 것으로 젓 먹는 아이가 짓는 구상작용까지도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량은 당연히 언어표현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 분별이 없는 즉 언어표현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 의해서 비량과 구별하고 있다. '착각이 아니다'는 것은 유효한 작용능력을 가진 실재를 말한다. 유효한 작용능력을 가진 실재란 형태, 속성, 색깔로 이루어진 것으로, 실제적으로 손가락을 불[火]에 가까이 가져갔을 때 손가락을 태우는 그 불을 말한다. 또한 착각이 아닌 것이란 틀린 인식에 의한 지각, 예를 들어 달리는 배에 탄 사람이 강 언덕에 있는 나무를 보고 움직인다고 하는 경우에도 현량이 아닐까하는 의심을 배제하며, 유효한 작용이 있는 것이 바른 인식이라는 점을 나타낸다. 이러한 착각이 아닌 성품은 진나의 현량에 대한 정의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법칭에 의해 첨가된 것이다. 착각의 원인은 감각기관, 인식대상, 외부의 조건, 자기 내부의 조건 등이 있다. 감각기관에 의한 착각은 눈이나 코 등의 질병 등이며 인식대상에 의한 착각이란 빠른 회전 등이다. 외부의 조건에 의한 착각이란 배 위의 여행 등이며, 자신의 내부의 조건에 의한 착각이란 병이 들었을 때의 교란, 급소를 강렬하게 타격 받은 것 등이다. 또한 현량은 감관에 의존한 것,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감관에 의하는 것'과 '앞에 나타나는 것'이란 범어의 어원적 해석에 의한 정의이다. 이는 곧 대상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인식임을 가리킨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현량의 인식대상을 자상이라 한다. 자상이란 그 자신이라는, 즉 다른 것과 공통되지 않는 것이다. 자상의 특성은 가깝고 먼 것에 따라서 명료, 불명료한 인식의 차이가 있다. 원근에 의해 인식의 나타남이 달라지는 대상은 효과적 작용력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효과적 작용능력을 특징으로 하는 자상은 최고의 진실이라는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효과적 작용능력이 없는 분별의 대상으로부터는 목적의 성취를 얻을 수 없다. 이상의 조건에 맞는 현량의 종류로 감관지(感官知), 의지각(意知覺), 자증지(自證知), 요긴의 지각 등 네 종류를 들고 있다.

비량의 인식대상은 공상이다. 공상은 구성적 지식으로 확정되어진 보편상으로, 원근에 따라 지식의 형상을 변경시키지 않는다. 보편적 특성이란 공통된 성질이라는 뜻으로 개념적으로 구성된 것은 어느 곳에서나 공통된 것이다. 비량은 증표 혹은 인(因)이 보여짐으로써 결정된 대상에 도달한다. 비량은 종(宗), 능증(能證, 因), 소증(所證)의 세 요소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산 위로 올라오는 연기를 보고 직접 관찰되지 않는 불을 추리할 때, 불을 추리하게 해주는 연기가 증표, 혹은 능증이고, 추리되는 대상인 불이 소증이며, 그 둘을 소유한 산이 비량의 주제인 종이다. 비량의 관건은 증표 혹은 인이며, 인이 바른 것인가 아니면 그릇된 것인가에 따라 비량지가 바른지 그른지가 결정된다. 인이 바른 것이고, 따라서 비량이 정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특성이 갖추어져야 한다. 인의 세 가지 특성은 첫째로 인은 종에 확정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연기가 바로 저 산에 불이 있다는 것을 추리케 하는 능증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산에 솟아오르는 연기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둘째와 셋째 조건은 증인이 바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소증과 불변적 수반관계를 가져야 한다. 긍정적 수반관계를 규정한 것이 두 번째로, 인은 '동품(同品)에만 확정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조건이며, 부정적 수반관계를 규정한 것이 세 번째로, 인은 '이품(異品)에는 확정적으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다. 곧 '연기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불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동품인 '아궁이'로서 실례를 보이는 것이고, '불이 없는 곳엔 연기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이품인 '호수'로서 실례를 보이는 것이다.

이상의 세 조건을 갖춘 바른 인은 소증과의 관계 양상에 따라 결과인, 자성인, 비인식인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소증이 능증의 원인이고 능증은 결과일 때, 결과의 존재로부터 원인의 존재가 증명될 수 있으며, 이 때 그 능증을 결과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저 산에 불이 있음을 증명하고자 할 때, 연기는 불이라는 원인의 결과이다. 그 연기가 지금 여기 있기 때문에 불이 존재함을 추리할 수 있으며, 여기서 연기를 결과인이라고 한다. 자성인은 인이 소증 자체의 본성이므로 본질적으로 인과 소증이 동일한 것일 때, 인의 존재는 그와 동일 기체에 속한 소증의 존재를 증명해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것은 나무이다 를 증명하고자 할 때 '보리수'는 뿌리, 줄기, 잎사귀 등 나무로서의 특징을 가진 점에서 소증과 본성이 동일하며, 따라서 소증은 '나무'의 존재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인이 된다. 불교논리학은 실체론적 학파와 달리 비존재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은 결코 인식할 수 없다고 믿는다. 다만 일종의 경험적, 현상적 행위로서의 비존재, 다시 말해서 '여기에 물단지가 없다'는 판단이나 언어로 표현된 주장, 혹은 그에 근거한 행위로서의 비존재와 관련하여, 비인식인으로부터 추리될 수 있도록 인정할 뿐이다. '물단지가 없다'는 비존재의 행위가 소증일 때, 그 증인은 '만약 그것이 이 장소에 있기만 하다면 인식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지만, 지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것을 비인식인이라고 한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면, 비인식인이 증명해주는 비존재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경험의 한계 내에 있는 존재로서 인식 가능한 것이며, 수미산이나 귀신이나 형이상학적 존재와 같은 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량은 직접 우리 앞에 나타난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 대상을 보여주며, 비량은 증표와 연결된 한정적 대상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둘은 확정된 대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바른 인식수단이다. 바른 인식의 수단인 현량과 비량으로 인식된 인식은 지각적 인식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바른 인식을 통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는 깨달음의 인식 즉 증오적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김치온/ 진각대학원 교수